땅을 박차고 달리는 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렸다. 뉴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층계에 앉아 육상 명문답게 흠잡을 곳 없이 정비된 트랙을 질주하고 있는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시회가 있는 달을 제외하곤 월요일과 수요일에만 부활동이 있는 미술부와는 달리 육상부는 매일 방과 후에 남아 훈련을 하곤 했다. 마침 부활동이 없는 화요일이라 육상부 훈련 구경이나 해볼까 라는 마음에 앉아있었지만, 정작 뉴트가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늘 훈련을 밥 먹듯 빼먹는 토마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성실하기 그지없는 육상부 주장 민호마저 보이지 않는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락이라도 해볼까 싶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낸 그 때, 시끌시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고 바라본 그 곳엔 역시나 민호와 토마스가 있었다. 뉴트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걸어오는 한 명과 끌려오는 한 명에게 손을 흔들었다는 게 맞으리라. 토마스는 민호에게 귀를 잡힌 채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고, 민호는 토마스에게 사정없이 폭언을 퍼붓고 있는 듯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선명해졌다.
"야, 이 대가리에 똥만 찬 놈아! 네가 문화부냐? 엉? 일주일에 두 번......아니, 두 번이 뭐야? 훈련에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일까 말까 하다는 게 말이나 되냐? 너 오늘 죽었어."
"아, 진짜! 아직 대회까진 멀었잖아! 왜 벌써부터 땀을 좍좍 흘리며 심장 터지게 뛰어야 되냐고."
"한 달 남았는데 멀었다는 말이 나오냐? 이 망할 놈이 진짜!"
뉴트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둘, 여전하네."
"뉴트!"
뉴트의 등장으로 자신의 귀를 붙잡고 있던 민호의 손에 힘이 빠지자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쪼르르 달려오는 토마스였다. 민호를 피해 뉴트의 등 뒤로 숨으며 긴 팔로 그를 끌어안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스킨십이 서슴없다니까, 뉴트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민호가 자꾸 구박해. 토마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이런 토마스의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소매를 걷으며 주먹을 치켜드는 민호였다.
"이 똘추 새끼, 진짜 죽여주마. 이리 안 와!"
자신을 사이에 두고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를 질러대는 민호와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피하며 이건 교내 폭력이야! 라고 소리쳐대는 토마스 덕분에 뉴트는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휘청휘청 사정없이 휘둘리고 있던 뉴트는 급기야 소리를 빽 질렀다.
"그만 하지 못해! 이 똘추들아!"
뉴트가 차례대로 두 사람의 머리를 가격하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머리통을 부여잡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죽겠다며 요란하게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토마스에게 뉴트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토미, 또 땡땡이치다 민호에게 붙잡힌 거야?"
"아니, 그러니까......"
"대회까지 한 달이 남았다면 코앞에 닥친 거나 진배없다는 생각엔 나도 동의하는데? 작년에 출전하지 못한 한을 이번 대회에서 다 풀어야 할 것 아니야. 그리고 대회와는 별개로 육상 선수는 언제나 기본적인 체력 훈련을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뉴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자신을 타이르자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시무룩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토마스였다. 민호는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뉴트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이 똘추야. 새겨들어.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쳇 소리를 내며 골반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보인다.
"걱정하지 마! 매일 아침 지각하지 않기 위해 뛰고 있으니 체력 훈련은 그것으로 됐지, 뭐. 그리고......"
안 봐도 뻔해. 작년엔 벤이 우승했다며? 그렇다면 이번 대회 단거리 달리기 종목별 우승은 어차피 내 차지일 텐데. 벤이 들었다면 분명 화를 냈을 법한, 오만함과 자신감으로 가득한 말에 다시금 핏대를 올리려는 민호를 뜯어말리며 뉴트는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토미, 기록을 재는 스포츠에선 말이야. 궁극적인 라이벌은 자기 자신이야. 과거의 너라고."
"......"
"자기 기록을 갱신하는 데에 집중해야지 그게 무슨 똘추 같은 소리야. 자, 잔소리 말고 어서 가서 훈련해."
입을 삐죽이며 무어라 툴툴거리던 토마스는 하-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별 수 없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는 입매가 시원했다.
"뉴트가 원한다면."
토마스는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곤 뒤돌았다. 입고 있던 긴 팔 저지를 벗으며 트랙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뉴트의 귀에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여간 건방진 놈. 진짜 재수 없단 말이야."
하지만 뉴트는 알고 있었다. 재수 없다는 민호의 말이 절반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민호는 그 누구보다 토마스를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불성실한 토마스의 태도에 코치님과 부원들이 무어라 한 마디씩 할 때면 민호는 늘 그의 편을 들어주곤 했다. 막 전학을 온 토마스에게 육상부에 들지 않겠냐고 끈질기게 권유했던 것도 민호였다. 토마스의 실력을 인정하고, 누구보다 아끼며 친하게 지내면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늘 툴툴거리기 바쁜 민호의 태도가 우습다는 생각에 뉴트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다소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녀석이 단거리 달리기 선수라서 다행이야."
"왜? 장거리 달리기 선수면 이길 수 없을 까봐?"
100m, 200m, 400m가 주력인 토마스와는 달리 민호는 5,000m, 10,000m를 뛰는 장거리 달리기 선수였다. 은근한 도발이 섞인 자신의 말에 이길 수 없다니? 누가? 내가? 웃기지마. 대번에 받아 치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민호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사실 부럽기는 해. 저 재능이......"
"......"
"하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한들 나는 지지 않아. 질 생각도 없고......그리고......"
"......"
"이상한 소리인줄은 알지만 나는 부럽고 짜증나긴 해도 토마스가 땅을 박차고 튀어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좋거든."
속내를 감추지 않고 훤히 드러낸 것이 쑥스러워진 모양인지 민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날도 추운데 대충 구경하고 얼른 집에 들어가라. 언제나처럼 거칠게 내뱉는 말 속엔 자신을 향한 애정이 서려있다. 그래, 열심히 해라.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뉴트를 뒤로 한 채, 민호는 트랙으로 달려가며 부원들에게 소리친다. 트랙 위엔 몸을 다 풀었는지 어느새 스타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토마스가 보였다. 짙은 눈동자 위로 번뜩번뜩 금빛 섬광이 비치는 듯했다. 달리기 직전의 토마스를 보고 있자면 나사가 수십 개는 빠져 보이는 평소의 그와 동일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신호총이 울림과 동시에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간다. 여전히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뉴트는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는 자신의 오른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희들이 가장 부러운 건 다름 아닌 나야. 하지만......”
토마스에 이어 민호도 트랙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뉴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부러워. 하지만 너희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는 게 나의 행복이기도 해. 뉴트는 마음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하며 토마스가 전학 온 1년 전의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추억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공기를 떠돌던, 쾌청했던 나날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