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해리 오스본 그림&글 통합 합작으로 제출했던 원고인데 공개가 되어 블로그에도 올려봅니다
합작 페이지 : http://pinkdoha.wix.com/mrosborn
번화가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우뚝 서있는 시계탑은 한때 피터와 나의 아지트였다. 피터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그곳으로 나를 데려간 것도 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시계탑은 관광객들을 위해 일주일에 단 한번만 내부를 개방했고, 그 외엔 안전상의 문제인지 혹은 관리상의 문제인지 관계자 외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벤 삼촌과 메이 숙모의 손을 잡고 시계탑을 구경하고 온 피터는 하루 종일 그곳에 대해 떠들었다. 너도 거길 가봐야 하는데. 아쉬움과 간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대충 그래그래 맞장구를 쳐주었던 기억이 있다. 피터의 시계탑 앓이는 한동안 계속 되었고, 좀 잠잠해지는가 싶었던 어느 날, 그가 헐레벌떡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가쁜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로 피터는 말했다. 시계탑 안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발견했어! 상기된 얼굴로 신이 난 목소리를 내는 피터에게 나는 이렇게 되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게 왜? 심드렁한 나의 대꾸에 피터는 무슨 그런 반응이 있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선 내 팔을 잡아당기며 시계탑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약 8년 전, 그 시절엔 늘 피터가 먼저 나에게 어떠한 것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쪽이었고, 그때마다 나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퉁명스레 반응했지만 결국엔 언제나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피터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시계탑은 정말 그의 말대로 건물 귀퉁이의 벽이 허물어져 어린 소년이 통과하기엔 무리가 없는 크기의 구멍이 나있었다. 흙과 먼지로 가득한 구멍을 힘겹게 통과한 뒤, 올려다본 시계탑의 내부는 무서울 정도로 웅장했다. 겁을 먹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뭐야? 이런 건 뉴욕 근교에 도처로 깔려있다고, 별다를 것 없는, 지저분하고 낡은 건물이잖아? 라며 피터에게 있는 대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피터는 늘 그렇듯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에이, 별다를 게 없다니. 뉴욕에서 가장 큰 시계탑이야. 게다가 저렇게 큰 시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중에 위로 올라가보자.]
그 말에 나는 손으로 머릴 짚으며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 같다. 피터의 엉뚱함에 지쳤다는 듯이. 하지만 이러한 나의 반응에도 여전히 피터는 내 앞에서 벙글벙글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 피터. 난 너완 달리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건 시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거든?]
거미줄로 가득한, 낡디 낡은 이런 곳을 왜 제 발로 들어와야 하는 건지......피터,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를 놈이야. 연거푸 구시렁거리는 내 반응에 피터는 눈치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다 이내 포기하고는 뒷머릴 긁적였다. 조금은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린다. 난 좋은데......
[난 좋은데......사람들도 없고,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웅장하게 울리는 것도 멋있잖아. 네 말대로 거미줄은 많지만 넓은 공간에 나무상자 같은 것들도 널려있어서 앉기도 편하고......무엇보다......]
[......?]
[너와 나, 단 둘만 알고 있는 곳이니까. 여긴 이제부터 우리 둘의 아지트야.]
우리 둘의 아지트야. 피터는 이렇게 말하며 내 옷에 잔뜩 묻어있는 흙과 먼지를 손바닥으로 쳐서 털어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피터는 그 시절에도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게 곧 사춘기로 접어드는 소년의 마음을 얼마나 흔들어놓을지, 얼마나 설레게 만들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끝을 모를 다정함으로 상대를 대했다. 피터가 이런 식으로 굴 때면 나는 귓불까지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일부러 더 까칠하고 거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이는 그 얼굴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피터는 무섭도록 다정했고, 그렇기에 무섭도록 잔인했다.
시계탑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한 뒤로 우리는 허드슨 강가가 아닌 시계탑 안에서 만나 놀기 시작했다. 논다고 말해봤자 기껏해야 어디선가 주워온 고물들을 열심히 만지고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피터를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다였다. 피터는 주로 가족과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나는 그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선 할 말이라곤 없었기에 대부분 잠자코 피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피터가 가족 그러니까 벤 삼촌과 메이 숙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환한 표정을 지을 때면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곤 했다. 왜냐하면 내가 느껴보지 못한 따스한 감정이 피터로 인해 충족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터에게 동감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가족’에 대해 본질적으로 그와 내가 같은 상실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혼자였고, 피터의 곁엔 다정한 삼촌과 숙모가 있었지만 우리의 상실감은 비슷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가족에 대한 이야기와는 달리 나는 피터가 학교 생활에 대해 말을 할 때면 한결같이 기분이 나빴는데, 피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 말했다. 피터의 얼굴이나 몸엔 늘 상처가 나있었고, 그 상처에 대해 물으면 또다시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했다. 아, 이거? 학교에서 맷이라는 애한테 맞았어. 싸웠어도 아닌, 맞았다고 말하면서 웃는 꼴이라니.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얻어맞고도 넌 웃음이 나오냐고 소릴 지르는 나에게 피터는 어깰 으쓱이며 나를 달랬다. 화내지마, 해리. 맞을 땐 좀 아팠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분명 피터는 날 달래려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피터의 말은 내 화를 더 부추겼고, 경호원들을 시켜 맷인지 뭔지 널 때린 놈에게 앙갚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피터는 길길이 날뛰는 나를 보며 여전히 웃는 얼굴로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순간, 그 손길에 모든 행동이 멈췄고, 내 두 눈엔 선량하기 그지없는 반듯한 얼굴이 가득 차올랐다.
[해리, 맷에게 달려들어서 주먹질하며 싸울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정말 괜찮아.]
[......너 정말......알고는 있었지만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로구나.]
사람 힘을 빼놓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피터의 말에 자연스럽게 마음은 가라앉았다. 신랄하게 쏘아대는 내 말이 뭐가 그리 웃긴지 피터는 큰 소리로 웃으며 기계부품을 만지작거리다가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고마워.]
[뭐가? 너한테 바보라고 해줘서?]
[아니, 걱정해줘서 고마워.]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고맙다고 웃어 보이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나 가슴 떨려왔을까? 사실 그 이유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피터를 줄곧 좋아하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시계탑은 우리 둘에게 특별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피터가 이곳에 관련된 엉뚱한 일을 제안할 것이라는 예상은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터가 어느 날, 편지지와 작은 유리병 두 개를 들고 와 이 곳은 우리에게 특별한 장소이니 몇 년 후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지금 종이에 적어 병에 넣은 다음, 시계탑 한 켠에 묻어두자고 말했을 때 나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띠며 여자애들이나 할법한 짓을 잘도 나에게 권하는구나 라며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 반응에도 피터는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었기에 별 수 없이 편지지와 유리병을 받아 들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 시절, 피터가 나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면 나는 싫든 좋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피터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지지를 펼쳐 들곤 널려있는 박스에 앉아 한참을 고민해보았다. 몇 년 후의 피터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자꾸만 망설여졌다. 무언가를 쓰려다가 멈추고 다시 쓰려다가 멈추는 답답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나에게 갑작스레 피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해리, 아직도 고민 중이야? 난 다 적었는데 이것 봐!]
예고도 없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 덕분에 나는 크게 놀라며 아무것도 쓰지 않은 편지지를 황급히 감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해맑은 표정으로 자신이 적은 것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피터가 들고 있는 편지지를 쳐다보았고, 이내 시선은 거기에 고정되었다. 편지지 위로 또래 소년들치곤 가지런한 피터의 글씨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해리, 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야. 사랑해. 그가 적어놓은 ‘사랑해’라는 말이 내가 느끼고 있는 ‘사랑’과는 분명 다른 의미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난 둔하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 나를 사로잡고 뒤흔들었기에 나는 숨을 가볍게 들이쉬곤 다시 한번 글씨를 마음속으로 읽어보았다. 해리, 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야. 사랑해. 떨릴 것이 분명한 목소리를 몇 번의 기침으로 감추며 나는 평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피터, 이 바보자식아! 이렇게 당장 보여줄 거면 몇 년 후에 공개하자는 말은 왜 한 거야? 땅에는 왜 묻고? 너 사실 진짜 바보지? 퍼부어대는 내 목소리에 그제서야 피터는 아차 싶다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편지지를 아무렇게나 구겨 버린다. 그러고선 다시 쓰겠다며 저 구석으로 한달음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피터가 눈치채지 못하게 구깃구깃 버려진 편지지를 주워들어 품 안 깊숙이 넣었다. 여전히 내 손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편지지가 들려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그것을 꼬깃꼬깃 접어 유리병에 넣고선 입구를 잘 봉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넣은 뒤, 흙으로 그 위를 덮기 시작했다. 몇 년 후, 피터와 함께 묻어놓은 유리병을 꺼내어 편지지를 펼쳤을 때 분명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왜 아무 것도 적지 않았어? 라는 질문을 할 것이다. 그 질문에 난 웃으며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말해주고 싶었으니까. 피터, 네가 좋아. 너를 사랑해. 물음표를 머리 위로 가득 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을 피터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곳에 마주서서 그에게 글이 아닌, 목소리를 내어 고백할 것이라 나는 다짐했다.
"해리! 이건 우리 둘의 문제야! 싸우고 싶으면 그웬을 놓아주고 나와 싸워!"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린 시절, 시계탑을 추억을 되새기기엔 충분했다. 몇 년 후,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되면 피터에게 널 좋아한다고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겠다던 자신의 옛 다짐이 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결코 입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그 고백을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기며 나는 가면 아래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을 피터에게 중얼거렸다. 그와 나의 아지트였던 이곳, 시계탑 위에서.
"......좋아."
그웬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자 짧은 비명과 함께 그녀는 시계탑 위로 떨어졌다. 시계탑으로 추락하는 그웬을 구하기 위해 피터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우리 둘의 추억을,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는 옛 시간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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