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운동회에 나올 예정인 중철 개인지 원고 공개분. (1편/ 총3편 예정)
-연극부 왕자 메이와 연극부 부원 사와무라가 나옵니다.
- 짝사랑 소재.
봄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잊을만하면 추적추적 비를 뿌려대곤 했지만 올해는 그 정도가 심했다. 아무리 전날 내일의 날씨를 확인한다 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기상청에서 떠들어댄 정보대로라면 햇볕을 내리쬐어야 할 하늘이 삽시간에 우중충한 얼굴로 변해 비를 쏟아내곤 했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오늘도 조금 전까지 화창했던 날씨가 거짓말이라는 듯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기에 나루미야 메이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서선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아,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부실에 들르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갈걸.”
미루고 미루다 대본을 가지러 며칠 만에 부실로 간 것이 화근이었다. 대본만 가지고 나올 심상으로 살금살금 들어간 부실엔 하필이면 부장인 미유키가 남아있었고, 그대로 꼼짝없이 붙잡혀 다음 달에 있을 연극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늦은 하교를 하게 된 나루미야는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진 맑았잖아!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 한들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그치진 않았다. 사실 평소라면 우산 따윈 없어도 무방했다. 심드렁한 얼굴로 건물 입구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여자들 중 누군가가 다가와 나루미야군, 혹시 우산 안 들고 온 거야? 라던지 나루미야 선배,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라며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우산을 내미는 상황이 펼쳐졌을 테니까.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짧게 말하곤 웃어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자들은커녕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기에 나루미야는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고선 비가 쏟아지고 있는 바깥을 향해 걸어나갔다. 뭐, 비 조금 맞는다고 어찌 되는 건 아니니까. 머리털이 걱정되긴 했지만 말이다.
나루미야의 집은 학교로부터 도보로 15분 거리의 주택가 중 한 곳이었다. 버스 등의 교통수단으로 통학하는 다른 학생들보단 가까운 편이었지만 걷기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교복은 물론이요, 속옷까지 싹 다 젖을 만큼 퍼부어대는 비를 맞고 있자니 15분 거리도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택시 탈 걸! 이왕 쫄딱 젖어버린 거 지금에 와서 택시를 잡아타는 것도 웃긴 일이었기에 나루미야는 투덜거리며 애꿎은 물웅덩이를 발끝으로 퍽퍽 찼다. 그때, 누군가가 뒤쪽에서 두다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나루미야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이 눈 안 가득 들어오며,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던 비가 한순간에 그쳤다.
“메이 선배, 꼴이 이게 뭠까?”
꼴이 이게 뭐냐고 묻는 것과는 달리 얼굴은 해사하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얼굴을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루미야는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야, 사와무라. 꼴이라니? 이게 진짜......너 자꾸 선배랑 맞먹지?”
“연극부의 왕자님이 비 맞은 생쥐 꼴이니 그렇지요. 선배 팬들이 이 꼴을 보면 죄다 떨어져 나가겠슴다.”
“야! 여자들이 떨어져나가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없슴까?”
상관있지요! 누가 뭐래도 선배는 우리 연극부의 상징이자 자랑! 그 유명한 연극부의 왕자님 아님까? 평소에도 이렇게나 소속부를 생각하고 생각하는! 성실하고 야무진 남자! 사와무라 에이준! 거리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크게 외쳐대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시원스레 웃어 보이는 사와무라였다. 그 모습에 나루미야 또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사와무라가 우산을 들고 있었기에 나루미야는 그가 걷는 속도에 제 걸음걸이를 맞추며 삐죽삐죽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꼴이 이렇다고 떨어져 나갈 애들을 내가 왜 신경 쓰냐?
“어차피 그런 애들은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는 건데......”
“아, 그건 맞슴다. 선배는 외모 빼면 시체니까요. 성격도 더러운 데다가, 밉살스러운 말도 아무렇지 않게 툭툭 해대지 않슴까? 그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
“죽을래? 이게 진짜?”
열 받는다는 얼굴을 하고선 나루미야는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사와무라의 볼을 꼬집어 잡곤 흔들었다. 므아아으! 사람 살려! 교내폭력! 죽는소리를 내는 사와무라가 얄미워 좀 더 손에 힘을 줘 보이는 나루미야였다. 교내폭력? 지금 학교 밖이거든? 한차례 호된 응징을 당한 사와무라가 벌건 볼을 어루만지며 외쳤다. 왕자는 무슨 왕자야! 이 악마! 진심으로 꼬집었죠? 금발 머리! 홀라당 벗겨져라! 아직도 혼이 덜 낫구나 싶어 이번엔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는 저 입을 잡아 흔들어줘야겠다 생각하며 나루미야는 도끼눈을 떠보았지만 입을 잡고 흔들기도 전에 푸스스 웃음기가 섞여 있는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농담임다, 농담. 모르긴 해도 선배 외모만으로 팬클럽이 생겼겠슴까? 선배가 인기 있는 건 외모도 외모지만 연기를 잘해서겠지요.”
“당연한 소리를 하고있......”
“좋아함다.”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에 나루미야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좋아합니다. 몇 번이나 상상한, 꿈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그 말이었다. 실제로 사와무라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상상보다 담백했고, 꿈보다 더 모호하고 흐릿했다. 나루미야가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와무라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선배 연기 진짜 좋아한다고요. 왜 그거 있잖슴까? 막 연극부에 들어왔을 때, 처음 본 선배의 연기 진짜 멋있었슴다. 지금도 그 순간이 잊혀지질 않을 정도라니까요! 그러니까......분명 작품명이......”
뭐야? 연기가 좋다는 말이었어? 이렇게나 김이 빠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사와무라를 쳐다보고 있던 나루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관의 아리아를 말하는거냐?”
“맞슴다! 그검다! 거기서 선배 연기 진짜 일품이었슴다. 평민을 사랑하게 된 공주 아리아가 결국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걸 포기하고선 이웃나라의 늙은 왕에게 시집가겠다고 말하는 그 다음 장면 말임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떠나기 위해 어두운 망토를 걸치고 성을 뛰쳐나가 숲을 가로지르는 공주의 머리 위로 달빛이 쏟아지고......”
“숲의 왕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지.”
“거김다! 거기! 그때 숲의 왕자 역이었던 선배가 은은한 조명 아래 등장해서 아리아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 말임다!”
아리아 공주, 그대의 아름다움이 슬픔에 잠겨 빛을 잃었군요. 사와무라는 마치 자신이 숲의 왕자가 된 마냥 몰입해 대사를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심하게 몰입했는지 들고 있던 우산을 들썩거릴 정도였기에, 우산에 맺혀있던 빗물이 후두둑 나루미야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야! 물 떨어지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나루미야의 반응에 아, 그렇슴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한 사와무라가 이내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배는 언제나 멋있지만 관의 아리아에선 특히나 더 멋있었음다.”
연방 자신을 멋있다고 칭찬하는 사와무라의 말에 나루미야는 들리지 않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와무라가 하는 칭찬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 나루미야가 제일 잘 알았다. 다른 의도라곤 전혀 없는 순수한 칭찬. 사와무라는 상대의 장점을 끌어내어,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곤 용기를, 자신감을 북돋아 준다. 분명 이러한 면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사는 거겠지 라는 생각에 미치자 나루미야의 머릿속에서, 짧지만 분명한, 사쿠마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사와무라에게 고백하려고.]
저도 모르게 나루미야는 얼굴을 구겼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입을 다문 자신을 사와무라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루미야가 황급히 말을 돌린다.
“너 있잖아. 보통 남자애들은 아리아역을 맡았던 타카코 선배 이야길 훨씬 더 많이 한다고.”
“아, 물론! 타카코 선배도 아름다웠슴다! 하지만 그날의 선배는 이상하리만치 반짝반짝 빛이 났다고요.”
“......”
“아름다운 장면이었슴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어색하진 않았다. 시원하게 퍼붓는 비 덕분에 주변은 온통 회색과 탁한 푸른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 계속된다. 짧은 침묵 끝에 나루미야가 천천히 입을 연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래, 아름다운 장면이었어.
“그렇지만 말이야, 아리아는 끝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다운 고백도 못 해보곤 이웃 나라로 시집을 가버리잖아. 그리곤 그곳에서 쓸쓸히 죽어간다고. 그 각본, 잘나신 부장, 카즈야가 쓴 건데 진짜 구렸거든? 뭐 그런 엔딩이 다 있냐? 성격 나쁜 거 각본에 대고 자랑을 하는 거야? 뭐야?”
“뭠까? 미유키 카즈야가 성격이 나쁘다는 말엔 동의하지만 선배가 할말은 아니잖......”
“야!”
대번에 나루미야가 휘둘러대는 주먹을 잽싸게 피한 사와무라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주먹을 피하기 위해 몸의 절반 이상이 우산 밖으로 빠져나가 쏟아지는 비를 맞아버렸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그 각본, 현실적이라 좋지 않슴까?”
“......뭐가?”
“고백하지 못하는 사랑도 분명 존재하니까요.”
“......”
“그렇잖슴까? 뭐 연극이나 영화, 만화 속에서야 주인공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에선 고백하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많잖슴까. 도무지 입이 안 떨어진다니까요?”
“......의외다?”
“뭐가요?”
“너 말이야, 너. 고백이 어렵다고 말하는 게 의외라고. 넌 단세포에 머리도 나빠서 그냥 앞뒤 안 가리고 그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고백한 뒤, 잔인하게 차일 것 같은 이미지라......”
“아니야! 이 금발아!”
누구 머리가 나쁘다는 거야! 그리고 왜 당연한 것처럼 차일 거라 생각하는데! 그것도 잔인하게! 진짜 사람이 왜 이렇게 못 되먹었슴까아아아! 붉그락푸르락 얼굴색을 바꿔가며 방방 뛰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나루미야는 신난다는 듯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뭐가 웃김까아아아! 사와무라가 사정없이 우산을 흔들며 분노했기에 온 사방에 물이 튀기 시작했다. 야! 물 튄다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루미야는 우산을 뺏어 들었다. 우산을 뺏기고도 방방 뛰던 사와무라가 입술을 쭉 빼고선 나루미야를 째려보며 기운 빠지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참나, 이래서 선배가 재수 없다는 검다. 뭐......인정......인정하긴 싫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으으으으 부들거리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 실소도 잠시, 이어지는 사와무라의 말에 나루미야는 착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가 어떻게 알겠슴까? 분명 이런 고민 따윈 해본 적도 없겠지요?”
선배의 반만 멋있어도 쉬울 텐데 말임다. 우물거리는 사와무라의 말에 나루미야는 반사적으로 대답할뻔했다. 나 안 멋있어. 목젖까지 치고 올라오는 말을 간신히 도로 집어삼키며 나루미야는 들키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멋있다는 거야? 답지 않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사와무라는 활기가 넘치는 얼굴로 다음 달에 있을 연극제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눈으로 흘끔 바라보며 나루미야는 며칠 전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날을 떠올린다. 멋있기는커녕 지지리도 못났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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