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스파이더맨2 - 피터해리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말에 언제나 그렇듯 피터는 사람 좋은 얼굴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는 말을 했다. 사심이라곤 없는, 그 특유의 호의에서 비롯된 제안을 해리는 또다시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늦은 밤, 넓고 깨끗한 해리의 사무실에서 둘은 마주보고 앉아 묵묵히 자료 정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카테고리 별로 나누어 정리하고 필요 없는 것들은 삭제 해야 했기에 한눈 팔 틈도 없이 두 사람은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뼈가 욱신거릴 정도로 눈이 아파왔기에 해리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곤 피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터, 커피 마....."
호기롭게 자신을 돕겠다고 나섰던 것과는 달리 키보드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피터의 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해리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 한 켠에 놓아둔 담요를 들고 와 피터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곤히 잠든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셀 수 없이 많았던, 하지만 피터에게 늘 닿지 않았던 고백들처럼 해리는 오늘도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결국엔 상처받는 건 자신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피터."
007 시리즈 - 00Q
목숨 아까운 줄 모르며, 장비 아까운 줄은 더더욱 모르는 007 덕분에 무기를 개발하는 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녹록지 못했다. 며칠밤을 지새운 건지 셈하는 것을 포기한 어느 날 밤, 철야엔 도가 튼 Q조차 해골이 흔들리는 느낌에 머리를 감싸 쥘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틀림없이 골아 떨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들어 이미 넘치게 섭취한 카페인을 보충하기 위해 머그잔을 집어 든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연구실을 울린다.
"카페인은 몸에 안 좋아."
".....별 수 없어요. 손대는 것마다 부수고 다니시는 어느 잘난 분 덕분에 월화수목금금금 철야 중이거든요."
가시가 돋쳐있는 대답에 007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 말인가?"
"잘 알고 계시네요."
"하지만 말이야....."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머그잔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서려던 Q의 어깨를 잡고 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오는 007이었다. 이 사람이 또 왜 이래? 라는 표정으로 Q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든 말든 007은 서로의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고선 중얼거렸다.
"내 무기만큼은 자네가 손봐줬으면 하거든."
애정을 담아서. 답지 않은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Q의 손에서 잽싸게 머그잔을 빼앗듯 가로채는 007이었다. 커피 정도는 내가 타오지. 유유히 탕비실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Q는 그제서야 자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드노아 제로 - 이나슬레
"하늘이 푸른 건 레일리 산란, 구름이 하얀 건 미 산란."
"그만 좀 할 수 없습니까? 조롱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조롱이라는 말에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듯이 슬레인을 바라보는 이나호였다. 카이즈카 이나호, 이 소년 앞에선 언제나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곤 했다. 슬레인은 더 이상 말려들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비장하게 인상을 굳혔다. 곧, 담담한 목소리가 울린다.
"조롱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뭡니까?"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는 거지."
잘나셨네요, 오렌지. 사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는 슬레인이 이나호에게 만큼은 시종일관 까칠한 목소리로 빈정거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슬레인의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이나호는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과 바다가 닿아있는 저 머나먼 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으스레한 눈동자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기에 슬레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 또한 그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맑고 푸른 하늘과 바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절경인 자연의 산물이었다.
"산란이든 굴절이든 딱히 상관없어."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지금 이순간 저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다는 거야."
이나호의 시선이 머나먼 곳에서 슬레인에게로 옮겨왔다. 잡아오는 손이 예상외로 차가웠기에 슬레인은 움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천천히 그에게로 끌어당겨진다. 서로의 얼굴 또한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이 맞닿기 전,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중얼거림이 슬레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렇게 함께 살아남아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욘두퀼
욘두는 저 구석에 앉아 신경 거슬리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퀼에게 당장 닥치라고 소리 칠 기세였다. 지구에서 퀼을 데리고 왔을-욘두는 퀼을 데리고 왔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때부터 작은 손에 꼭 쥐고 있던 소니 워크맨과 MDR 헤드폰 그리고 그 망할 놈의 ‘끝내주는 노래 모음집’이 생각해보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지금까지 저 ‘끝내주는 노래 모음집’의 트랙리스트를 돌고 돌아 듣고 듣고 또 듣다 보니 이젠 꿈에서도 나올 지경이었기에 욘두는 오늘에야 말로 기필코 저 망할 워크맨과 헤드폰, 테이프를 박살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저벅저벅 큰 걸음으로 걸어가 퀼의 머리통에서 헤드폰을 빼내려고 한 그 순간, 어느새 눈치를 챈 건지 어딜! 이라고 외치며 몸을 피하는 것을 보며 욘두는 빠직 이 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한번만 더 내 우주선 안에서 그 망할 노래들을 흥얼거리면 어떻게 하겠다고 그랬지?”
“거참, 더럽게 까칠하네. 하여간 이래서 안 된다니까.”
음악이라는걸 사랑할 줄 모르는 꼰대 같으니. 불에 기름을 붓는듯한 그 말을 시작으로 하루에 최소 한번은 벌어지는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우주선을 부술 기세로 싸워대는 두 사람 덕분에 죄 없는 라바저들은 최대한 몸을 사리며 날아오는 집기들을 피할 뿐이었다.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듯 제대로 실력 행사를 하려는 욘두에게 퀼은 소리쳤다.
“이거나 먹어라, 이 꼰대야.”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헤드폰을 욘두에게 씌운 뒤, 음을 최대로 올리는 퀼이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격에 헤드폰을 거칠게 벗어 집어 던지려는 그 순간, 음을 낮추며 퀼은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지 말고 제대로 들어봐요.”
내 흥얼거림이 아니라, 제대로 된, 끝내주는 노래들을. 퀼을 향해 무어라 욕지기를 내뱉던 욘두는 별 수 없다는 듯 입 꼬리를 올리며 웃고 마는 것이었다. 망할 꼬맹이, 헤드폰을 낀 채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는다. 퀼의 흥얼거림으로 이미 익숙한 노래가 귀를 파고 들었다.
인더플래쉬 - 사이렌
“키어런 워커.”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사이먼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면 키어런은 이상하게 매번 가슴 한 켠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무덤 앞에서 처음 그와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고 그와 동시에 익숙한 설렘을 가져다 줬다.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자신을 올려다 보는 키어런과 눈을 마주치며 사이먼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금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 감촉이 어딘가 모르게 따스해 눈을 감아보는 키어런이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길은 턱을 타고 내려와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키어런이 몸을 움츠리자 사이먼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그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긴 속눈썹에 입을 맞췄다. 귓가에 다시금 자신의 목소리가 울린다. 가슴이 떨려온다.
“키어런 워커.”
키어런은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이먼의 손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살짝 말라있는 입술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옭아매듯 혀가 감겨왔다. 이 입맞춤이 끝나면 사이먼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키어런은 다짐했다. 이미 한번 멈추었던 심장이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퓨리 - 워대디노먼 (루지님 생일 축하글)
전쟁의 잔인한 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고 콜리어 하사 아니, 워대디는 늘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버려야 한다. 감정도, 소중한 것도, 심지어 살아남고 싶다는 욕망도 버리곤 잃을 수 있는 것들을 차츰차츰 줄여나가야지 만이 길고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이가 될지언정 몇 시간 전에 웃으며 대화를 나눈 전우들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이러한 현실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는다. 어쩌면 자신에게 내려진 신의 징벌 혹은 저주일지도 모르는 퓨리라는 탱크와 함께 하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그렇기에 워대디는 막 자신의 밑으로 배치된 신병 노먼에게 모든 것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려 했다. 독일군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했던 것 또한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노먼은 결국 독일군 포로를 죽이지 못했고, 그저 자신에게 닥친 이 엿 같은 상황에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은 원래 어려운 법이니까요. 대장도 처음엔 그처럼 눈물을 질질 흘렸을 것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가끔은 사람의 마음을 기분 나쁠 정도로 꿰뚫어보는 바이블의 말이 생각나 워대디는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삼삼오오로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부대원들을 놔두고 워대디는 자신의 탱크, 퓨리 안으로 들어갔다. 충격이 좀 가신 모양인지 쭈그리고 앉아 깊은 잠에 빠져있는 노먼의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워대디는 자신의 윗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었다. 전쟁터를 누비느라 거칠어진 손길에 그가 깨지 않을까 답지 않게 조심하면서.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다 데려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잠들어있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것 또한 마음 속 깊이 삼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삼킨 이 말도 언젠간 버려질 것이다. 전쟁은 버리는 것이니까. 노먼을 바라보는 워대디의 얼굴은 진한 그늘이 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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