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님(@vtymi) 생일 축전으로 드리려고 쓴 짧은 글. ^^; 미쿠라도 맛있네요. 녑녑녑~
헤어진 연인과 재회를 하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퇴근 시간, 사람들로 북적이는 승강장 안에서 익숙한 얼굴과 마주하기 전까진 이러한 생각은 어렴풋한 망상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상대 또한 자신을 발견하고선 놀란 듯 눈을 크게 뜸과 동시에 얼굴 위로 감춰지지 않는 망설임이 스치는 걸 보며 미유키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기분이구나. 알겠다는 듯 중얼거리긴 했지만 몇몇 단어들만으로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표현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저 멀리서 미유키를 바라보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쿠라모치 요이치는 이제 와서 고개를 돌려 못 본 척을 하기엔 늦었다고 판단을 했는지 짧은 한숨을 내쉬곤 어색한 걸음으로 미유키가 앉아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쿠라모치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미유키는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인사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잘 지냈어? 요즘 어떻게 지내? 여전히 회사는 바빠? 그러나 애써 떠올린 수십 가지의 인사말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쿠라모치의 짧은 인사에 머릿속에서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어이, 미유키."
너무나도 그다운 인사였기에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이 상황에서 미유키의 입술 사이로 어울리지 않게 픽 하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뻣뻣한 얼굴을 하고 있던 쿠라모치가 살짝 인상을 쓰며 몇 년 전처럼 틱틱거리는 목소리를 낸다.
"뭐냐? 사람이 인사를 했는데 웃고 난리야."
"아, 미안. 그냥......"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미유키의 이 말에 쿠라모치는 대번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진다. 변한 게 왜 없냐?
"......엄청나게 변했지."
"......"
"너도, 나도."
엄청나게 변했지. 쿠라모치의 말 속에 숨어있는 속뜻을 모를 만큼 미유키는 둔하지 않았다. 미유키와 쿠라모치, 두 사람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쿠라모치의 말대로 두 사람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고선 그렇게 떨어져있었으니까. 자신의 말에 착잡한 표정을 짓는 미유키를 내려다보며 쿠라모치는 다시 한 번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미유키가 앉아있는 긴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바로 옆이 아닌 한명분의 자리가 남게끔 거리를 두고서. 앉자마자 갑갑하다는 듯이 목에 매고 있는 넥타이의 끈을 느슨하게 풀며 쿠라모치는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다. 집에 가는 길이야? 내가 탈 열차는 10분 뒤에나 온다고......아무렇지도 않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 있는 쿠라모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미유키의 머릿속에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 전인 고등학교 시절이 자꾸만 떠오른다. 정확히는 고등학교 시절, 빛 바랜 어느 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무렵, 사랑 고백이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뒤뜰과 빈 교실에 불이 나도록 남녀가 마주하고 서 있었고, 편지가 오고 가고, 행복한 얼굴로 웃었으며 또는 고개 숙여 눈물을 닦아내곤 했다. 이러한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미유키조차 눈치를 챌 만큼 교내엔 들뜬 마음이 가득했다. 미유키와 쿠라모치가 단둘이 빈 교실에 남아 스코어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날도 그때 즈음이었다. 스코어북을 보며 경기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하던 중, 미유키의 눈에 창문 밖 뒤뜰의 남녀가 들어왔다. 아마도 여자 쪽이 고백을 하는 입장인지 얼굴이 붉디붉었다. 들리진 않지만 꾹 다물어진, 미미하게 떨리는 입가를 보아선 고백의 말을 꺼내는 것이 힘든 모양이었다. 끝내, 마주하고 서있던 남학생이 무어라 짧은 말을 내뱉곤 등을 돌려 가버린다. 붉은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릴 정도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미유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렵네.]
[......? 뭔 소리야?]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 물어오는 쿠라모치를 바라보며 미유키는 고개를 까닥여 창문 밖을 가리킨다. 창문 밖을 내다본 쿠라모치는 특유의 빠른 눈치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곤 고개 숙여 울고 있는 모습이 꽤나 안타깝다는 듯이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우는 여자를 놔두고 그냥 휙 가버린 거냐?]
인정사정없는 놈이네. 아무렇게나 내뱉는듯했지만 쿠라모치 특유의 안타까움과 다정함이 묻어났기에 미유키는 웃으며 말했다.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고 우물거리는 게 답답했나 봐.]
[이왕 용기를 내서 불러냈다면 고백도 시원스레 해버릴 것이지......]
뒤뜰에 우두커니 서서 연거푸 눈가를 닦아내는 모습이 영 딱한 모양이었다. 창문 밖으로 향해있는 시선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에 미유키는 들고 있던 펜을 놓으며 물었다.
[넌 어때? 시원스레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아? 너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 나라면......]
[......]
[일단 놓치지 않게 손에 힘을 줘서 옷을 꽉 잡은 뒤, 이렇게 말할 거야. 좋아한다고.]
[......]
[옷을 잡은 손을 놓게 될지, 혹은 마주 잡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잡을 거야.]
[이렇게?]
미유키가 쿠라모치의 교복 셔츠를 잡은 건 그때였다. 여유로운 표정과 목소리와는 달리 셔츠를 잡은 손이 미미하게 떨린다. 난데없이 셔츠를 잡아온 미유키의 행동에 쿠라모치는 하던 말을 멈추곤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잡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는 거야? 되묻는 미유키의 목소리에 한참을 크게 뜬 눈으로 멍하게 있던 쿠라모치의 입에서 픽 하고 힘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걸 바로 써먹냐? 너라는 놈은......]
[......]
[......좋아한다는 말은 어디 갔다 팔아먹었어?]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웅얼웅얼 말을 흐리는 쿠라모치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미유키는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뭐야? 듣고 싶어? 놀리듯 물어오는 목소리에 쿠라모치는 얼굴을 구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이 망할 놈아! 얼굴을 구기며 소리를 지른 것도 잠시, 어느새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피식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유키의 손은 쿠라모치의 셔츠를 잡고 있었다.
"그럼 잘 있어라."
미유키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던 사이, 기다리던 열차가 승강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기에 쿠라모치는 짧은 작별인사를 건넸다. 승강장에 멈춘 열차를 타기 위해 쿠라모치는 몸을 일으킨다. 잘 있어라, 내뱉은 목소리가 초조하리만치 태연하게 들렸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미유키는 쿠라모치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나 그가 걸치고 있는 윗옷의 끄트머리를 반사적으로 움켜잡았다. 옷을 잡힌 탓에 걸음이 멈춘 쿠라모치는 놀란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렇게 헤어지면 다음은 언제일까? 사실 다음이라는 것은 영원히 없을지도 몰랐다. 쿠라모치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미유키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나온다.
"이렇게......"
"......?"
"이렇게 잡는 거라며?"
"......"
"놓치지 않게, 손에 힘을 줘서, 이렇게......"
쿠라모치가 기다리고 있었던 열차는 곧 승강장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제 윗옷을 움켜쥔 미유키의 행동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쿠라모치는 마찬가지로, 과거의 어느 순간이 떠오른 모양인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해 보인다. 옷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려는 듯 강하게 잡은 것도 잠시, 미유키의 손을 잡고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태워야 할 사람을 승강장에 남겨둔 채로. 쿠라모치의 입에서 난감하기 짝이 없는,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옷 구겨져, 망할 놈아. 열차가 철로 끝으로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미유키는 쿠라모치의 옷을 붙잡고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