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세 등장, 남성 임신 세계관 주의
- 원작과 나이설정이 다릅니다. (성인AU)
출근 시간대를 비켜간 시가지는, 원래라면 조금은 조용하고 한산해야겠지만 펑펑 터지는 소음과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시가지 한가운데에서 날뛰고 있는 빌런은 기이할 정도로 몸집이 큰 사내였고 자신의 피부를 돌로 만들어 외부에서 가하는 충격을 흡수하고, 그 돌을 포탄처럼 쏘아대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빌런을 둘러싼 여러 명의 히어로들 가운데 짜증이 한 가득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오, 썅! 무슨 놈의 피부가 이렇게 딱딱해? 야! 동글이!"
네가 손만 댔어도 지금쯤 발 닦고 잠이나 자고 있겠다! 우라라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바쿠고였다. 그 말에 발끈 화를 낼만도 했지만 학창시절부터 늘 겪어왔던 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녀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우라라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렇게 따지면 방금 전 빈틈이 보여 내가 접근하려 할 때, 바쿠고군이 신명 나게 폭파해댄 탓이 훨씬 크지. 핵심을 찌르는 우라라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바쿠고는 눈을 사납게 치켜 뜨며 시......시꺼! 더욱더 목소리를 높인다. 바쿠고의 폭파를 석화된 피부로 막아내고 있다 한들, 타격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맷집에는 자신이 있는 모양인지 빌런은 꿋꿋하게 바쿠고의 공격을 온몸으로 버텨내며 돌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대로가다간 이 일대가 남아나질 않겠다는 생각에 바쿠고는 쳇, 짧게 혀를 차며 이 빌런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폰에서 주인을 닮은 시끄럽고 요란한 벨소리가 울려댔다.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아까 전부터 몇 번이나 끈질기게 울리는 벨 소리를 무시했기에 어떤 새끼가 이렇게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대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폰을 꺼내 드는 바쿠고였다. 폰 액정 위로 '데쿠'라는 글자가 보인다. 바쿠고는 쏟아지는 빌런의 공격을 피하며 신경질적으로 통화버튼을 누르곤 냅다 외쳤다.
"야! 데쿠! 바빠! 끊어!"
사정없이 종료버튼을 누르려던 때에 폰에서 흘러나온 미도리야의 다급한 목소리가 바쿠고의 손가락을 멈추게 만든다. 미도리야의 말에 뭐? 데쿠! 크게 말해! 놀란 표정으로 닦달하는 바쿠고였다. 캇짱......에리가......미도리야의 입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이름이 나오자 바쿠고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당장 그리로 갈 테니까 기다려!"
[카......캇짱......]
시가지가 붕괴되기 오보직전인 이러한 상황에서 여유롭게 통화나 하고 있냐고 말하려 고개를 돌린 우라라카의 눈에 흉흉하다 못해 살기가 번뜩이는 얼굴로 무너진 건물 더미를 박차고 뛰어오르는 바쿠고가 들어왔다. 바쿠고군! 당황한 우라라카의 외침이 들리지도 않는지 난동을 부리고 있는 빌런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바쿠고는 온 힘을 다해 오른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뒈져! 이 새끼야! 바쁘니까 지금 당장 죽어!"
모래바람이 일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그 일대를 사정없이 울리며 빌런에게 직격으로 들어갔다. 무수한 공격을 꿋꿋하게 버텨내던 빌런도 혼신의 힘을 다한 바쿠고의 맹공을 버틸 순 없었던 모양인지 눈에 흰자를 띠우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빌런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바쿠고는 자신을 부르며 다가오는 우라라카에게 뒤처리를 부탁한다고 말하곤 어디론가로 서둘러 향하기 시작했다. 삐죽삐죽한 뒤통수에 대고 어디가, 바쿠고군! 우라라카가 황급히 외치자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바쿠고가 말했다.
"......유치원."
미도리야 에리는 5살답지 않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유치원 건물 구석에 숨어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있었다. 노란색 유치원복과 어깨에 맨 작은 가방, 굽슬굽슬한 녹색 머리와 얼굴에 나있는 주근깨는 미도리야를 닮았지만 찌푸린 얼굴과 사납게 뜬 적색 눈, 흰 피부는 영판 바쿠고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이 입술을 앙 물고선 인상을 쓰고 있는 에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누군가가 저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숙였던 고개를 들자, 앞엔 다름아닌 에리의 아빠, 미도리야가 난처하다는 얼굴을 하고선 서있었다. 미도리야라는 걸 확인한 에리의 고개가 다시 푹 숙여진다. 그 모습에 미도리야는 에리의 옆에 앉아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리, 아빠 왔는데 인사도 안 할거야?"
"......몰라. 다 미워. 속상해."
"우리 공주님이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아빠 궁금한데......"
말해주면 안될까? 응? 다정다감한 미도리야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선 눈물을 참고 있는 에리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점점 느리고 조심스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에 위안을 받은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앙 다물고 있던 에리가 울먹울먹 눈물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자애들이 아빠가 둘이라고 놀렸어. 그래서 싸웠는데 내가 우리 대디랑 파파가 얼마나 멋진 히어로인지 아냐고 그러니까 애들이 파파를 놀리잖아. 그런 히어로가 어디 있냐고, 완전 무섭다고, 사실은 빌런 아니냐고 자꾸 놀려서......그래서......그래서......"
"그래서......때려준 거야?"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였다. 이것 참, 이런 점은 캇짱을 닮았다니까. 에리는 언젠가부터 미도리야를 대디로, 바쿠고를 파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빠라고 부르면 둘 다 돌아본단 말이야. 칭얼거리는 에리의 말에 놀러 왔던 우라라카가 정해준 호칭이었다. 바쿠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남자애들을 때려줬다는 에리의 말에 잘했다고 박수를 쳤겠지만 미도리야는 미소 띤 얼굴로 에리의 볼을 쓰다듬었다. 입이 삐죽삐죽 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에리, 친구들을 때리면 안되지."
"그치만......"
치켜 뜬 커다란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미도리야는 당황하며 주머니에서 얼른 손수건을 꺼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미도리야는 말을 이었다.
"에리, 생각해봐. TV에서 파파가 나쁜 사람들이랑 싸우는걸 봤지?"
"......응."
"파파는 종종 늦게 집에 들어오잖아. 나쁜 사람들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고, 사람들을 구하다가 늦게 들어오고 그런 거야."
"......"
"그러니까 친구들이 그런 점을 모르고 파파를 욕하며 놀린다고 해서 화내고 슬퍼할 거 없어.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파파는 멋진 히어로고, 에리의 파파인걸.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리고 아빠가 둘인 게 어때서? 다른 애들은 하난데? 에리가 다른 애들과는 달리 특별하다는 뜻 아닐까? 아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말에 흐르는 눈물이 잦아들었다. 바쿠고의 아이가 아니랄까봐 특별하다는 말이 내심 마음에 드는지 눈물을 멈춘 에리가 미도리야를 쳐다보았다. 에리의 큰눈에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미도리야의 선량한 얼굴이 들어온다. 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다는 생각에 미도리야에게 폭 안겨선 가슴팍에 볼을 부비적거리고 있던 에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론 안 그럴게."
"그래, 그래, 친구들이랑도 나중에 꼭 화해하는 거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버려 흙이 잔뜩 묻은 에리의 바지를 털어주며 웃던 미도리야가 헛!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황급히 에리에게 말했다.
"아참, 에리. 이번 일은 파파한테 비밀로 하자. 응?"
"왜?"
"왜냐면 파파가 알면 또 한바탕......"
"데에쿠우우우우!"
뒤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히이익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는 미도리야였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온 건지 흙먼지와 검댕이를 뒤집어 쓴 히어로 복장의 바쿠고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미도리야를 향해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앗! 파파다! 파파! 죽일 듯 미도리야를 보며 으르렁거리던 바쿠고의 표정이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에리의 얼굴에 대번 풀어졌다. 더 이상 이글거리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척척 이쪽으로 다가온 바쿠고가 자신의 멱살을 잡았기에 미도리야는 살짝 겁먹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카......캇짱......저기......그러니까......
"다 들었어! 뭘 비밀로 하자는 거야! 숨길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말......"
"앗! 대디, 파파, 싸우지마! 남자애들이 아빠만 둘이라고, 엄마도 없다고 놀렸지만 이제 괜찮......앗! 대디! 미안!"
대디가 비밀로 하자고 그랬는데! 당황하며 합하고 입을 틀어막는 에리와 그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으아아 소리를 지르는 미도리야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바쿠고를 바라본 미도리야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방금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던 바쿠고가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죽었어! 뒤진다, 진짜! 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유치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기등등한 얼굴로 유치원을 날려버릴 기세인 바쿠고를 다급하게 쫓아가 간발의 차로 붙잡는 미도리야였다.
"캇짱! 안돼! 5살밖에 안된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할 셈이야!"
"놔!"
미도리야에게 붙잡혀 발버둥을 치는 바쿠고였다. 나참! 캇짱, 제발! 히어로답게! 미도리야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선 바쿠고는 자신을 잡고 있는 팔을 뿌리치며 외쳤다.
"놓으랬다! 데쿠! 이 너드새끼! 네가 그러고도 부모냐! 에리가 그런 말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어? 엉? 그래! 내가 오늘 이 유치원을 아주 통째로......악! 데쿠! 너 이 새끼! 지금 개성 쓴 거냐? 야!"
팔을 뿌리친 것도 잠시, 미도리야의 원포올에 움쭉달싹 못하고 붙잡힌 바쿠고가 소리를 질러댔다. 놓으라며 난리를 치는 바쿠고를 끌어안은 미도리야가 우물쭈물 대꾸했다. 그......그치만 캇짱을 막으려면 나도 별수가......막으려는 미도리야와 품을 벗어나려는 바쿠고로 난리가 난 가운데 두 사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에리의 얼굴 위로 점점 웃음꽃이 피어난다.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파파는 멋진 히어로고, 에리의 파파인걸. 다정한 미도리야의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냉큼 달려간 에리가 주변을 폭파하기 오보 직전인 바쿠고와 그를 껴안고 있는 미도리야 사이로 파고들자 거짓말처럼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신들의 사이에 파고들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도리야와 바쿠고의 손을 하나씩 잡은 에리가 밝게 웃으며 외쳤다. 대디! 파파! 나 배고파!
"나 카레 먹고 싶어! 카레 먹으러 가자!"
발그레한 얼굴로 해맑게 웃는 딸의 모습에 미도리야와 바쿠고,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미도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유치원을 박살낼 기세였던 바쿠고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뻗는 에리를 들어서 품에 안은 바쿠고가 미도리야에게 말했다. 가자, 데쿠. 소란스러웠던 하루를 마무리하는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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