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막 끝난 쉬는 시간, 교실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얼른 사와무라군에게 물어보자. 늘 함께 붙어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삼인방 중 한명인 사토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왔기에 물먹은 솜처럼 책상 위에 힘없이 엎드려있던 사와무라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반쯤 뜬 눈으로 사토를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삼인방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흘끔흘끔 사와무라를 바라보다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까르르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데 그러냐? 삐죽거리며 물으려던 참에 세 명의 여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쪽으로 먼저 다가왔다.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을 미루던 것도 잠시, 시원시원한 성격인 스즈키가 대뜸 손에 들고 있는 만화책을 들이밀며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사와무라군, 실례일 수도 있지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후루야군 닮지 않았어?]
만화책? 주인공?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든 만화책의 표지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쯤 감겨있던 눈이 서서히 크게 떠졌고, 사와무라는 에엣? 큰소리를 내며 만화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야! 스즈키! 남자 둘이서 이게 무슨 망측한 행......읍읍읍.]
소란스러운 사와무라의 반응에 스즈키는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그리고 훤히 다 보이게 들지 말라고! 당당하게 보여줄 땐 언제고 조용히 하라니? 훤히 보이게 들지 말라고? 얼척없다는 얼굴을 해보이고선, 사와무라는 만화책의 표지로 눈을 돌렸다. 표지엔 남색이 언뜻언뜻 비치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붙잡아 깔아 눕히고선, 상대의 옷을 뜯어버릴 듯이 우악스럽게 벗기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있었다. 이게 뭐야? 왜 죄 없는 옷을 잡아뜯는 거야! 이게 무슨 짓인데? 그리고 갈색머리 너 인마! 싫으면 주먹을 날리거나 사타구니를 걷어차야지! 왜 얌전히 깔려있는 거야! 아니, 이게 아니라! 사와무라는 엉뚱하게 흐르는 생각을 다잡으며 다시 한 번 표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표지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성인본 표시를 확인한 사와무라는 이게 뭐냐는 듯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삼인방......그러니까 스즈키, 사토, 모리를 차례대로 쳐다봤다. 늘 수줍음을 타는 모리는 스즈키와 사토 뒤에 숨어 평소에도 발그레한 얼굴을 더욱더 붉은 빛으로 활활 태우고 있었고, 사토는 옆에 서있는 스즈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러댔다. 흠, 흠, 어색한 소리를 몇 번 낸 스즈키는 뭐가 문제냐는 듯 팔짱을 끼고선 말했다.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
[뭐? 그럼 뭐가 중요해?]
[그러니까 이 검은 머리 남자......후루야군 닮지 않았어?]
[에? 그렇게 물으니......닮은 것도 같은......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뭐냐고! 이 무슨 망측한 책이냐? 스즈키!]
[조용히 좀 해! 정말! 이건......그러니까 말이지......]
BL이라는 거야. 스즈키의 말에 사와무라는 물음표를 한가득 띄우며 물었다. 비......비......뭐? 사와무라의 물음에 스즈키는 눈에 힘을 주고선 한 번 더 또박 또박 알려줬다. 비! 엘! 보이즈 러브의 준말로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주제로 한......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스즈키의 설명에 사와무라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런 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건데! 스즈키의 열과 성을 다한 BL 강의는 사와무라로 인해 가차 없이 끊겼다. 이러한 반응에 스즈키 또한 지지 않고선 책상을 두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물어보기 창피했지만! 너무 닮았단 말이야! 사와무라군은 늘 후루야군이랑 붙어 다니니까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 아니야?]
그리고......사실......우리 내기했거든. 강경한 태도를 굽히며 어색하게 웃는 스즈키를 향해 에엣? 사와무라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세 사람은 지난 일요일, 스즈키의 집에 모여 사이좋게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제의 만화책’에 나오는 검은 머리 남자 주인공이 어딘가 모르게 후루야를 닮은 것 같다는 사토의 말에 스즈키가 동의하며 떠들기 시작했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모리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되자 세 사람은 한참동안 맞다, 아니다, 논쟁을 벌이다 결국 그럼 후루야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결론을 내리자고 내기를 하게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사와무라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버럭 외쳤다. 늘 붙어 다니지 않아! 같은 야구부의 라이벌 일뿐이라고! 이러한 사와무라의 주장에 스즈키는 아?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고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 얼른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 말을 해달라고 닦달을 하기 시작했다. 응? 닮았지? 닮았지? 부담스럽게 얼굴을 들이미는 스즈키와 사토의 뒤에서 모리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달라, 후루야군은 그런 표정 안 짓는단 말이야. 사와무라는 자신을 향해 얼굴을 들이미는 세 사람을 피하려고 의자를 뒤로 쭉 빼며 물러서선 삿대질을 해댔다. 아니, 내기건 뭐건 간에! 몰라! 알게 뭐야! 이상한 만화책이나 들고 와서 요상한 것만 물어대고! 이 망측한 물건을 들고 얼른 저리 가라며 외치려던 때에 무섭기로 전교에 엄하기로 소문이 난 수학 선생님의 벼락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다들 제자리에 앉아! 그제서야 사와무라를 둘러싸고 있던 세 사람은 이크, 짧게 중얼거리며 썰물처럼 흩어졌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사와무라는 한숨을 몰아쉬곤 뒷머릴 긁적였다. 정신 사나워 죽을뻔했네. 됐고, 수업이나 듣자! 사와무라는 교과서를 펼친 뒤, 연필을 물고선 칠판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수업을 듣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물고 있던 연필을 책상 위에 떨어트리며 꾸벅꾸벅 세상모르게 졸기 시작했다.
밥을 꼭꼭 씹어 삼키고 있던 후루야의 귀에 장난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후루야의 모든 신경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유키와 쿠라모치에게 집중된다.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 사와무라에 관한 대화임이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느린 편인 젓가락질이 점점 느려져 아예 허공에 멈췄다.
“웃을 일이 아니라고. 간밤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진짜 사와무라가 어떻게 잘못되는 줄 알았단 말이야. 하기야 나도 뭐, 처음엔 녀석이 코를 훌쩍이며 연신 기침을 해대길래 감기 따위나 걸리고 난리냐며 비웃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밤새도록 죽어라 앓아대지 뭐야. 결국 타카시마 부부장이 이른 새벽부터 기숙사에 들러 병원에 데려갔어. 오늘 연습은커녕, 수업도 못 들어갈 거다.”
“......”
“밥 먹으러 오기 전에 보니까 시체 같은 몰골로 병원에서 돌아와 약 먹고 바로 눕던데 괜찮은지 모르겠네. 하루도 빼먹지 않고 타이어를 허리에 매고 달리고, 새벽까지 남아서 투구 연습을 해대면서도 기운이 넘치다 못해 폭발을 하더니......”
쿠라모치의 말에 후루야는 지난 밤, 평소와는 달리 조금 이른 시간에 투구연습을 마치던 사와무라를 떠올렸다. 평소처럼 목소리는 컸지만 어딘가 모르게 힘없는 얼굴로 연신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볼까?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하는 새에 내일 보자, 짧은 인사를 하며 사와무라는 돌아선다. 감기에 걸린 거였구나. 어디 아프냐고 물어볼걸. 누군가가 가슴 한 켠을 누르고 있는 듯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애절하다, 애절해. 쿠라모치, 후배를 걱정하는 네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서 밥이 안 넘어갈 지경인데? 어디 보자, 가슴은 안 찢어졌어?”
쿠라모치를 향한 미유키의 말이 어째 저 들으라 하는 말인 것 같아 흠칫 놀라는 후루야였다. 물론 놀랐다고는 한들 이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슬며시 내려다본 가슴은 찢어지지 않은 채 잘만 있었다. 그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의 입에서 후루야군은 다 좋은데 말이야 라며 단점으로 꼽혔던, 무표정한 얼굴이 오늘만큼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후루야는 먹고 있던 밥을 고스란히 남기고선-물론, 근처에 앉아있던 조노가 소리쳤다. 어이, 후루야! 밥 남기지마! 먹어야 연습을 하지!-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선다. 쿠라모치와 미유키가 무어라 더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은 사와무라가 감기에 걸렸고, 아프다는 것으로 가득 차있었으니까.
하늘은 더없이 새파랗고, 하얀 구름이 천천히 흐른다. 수업시간, 멍하니 창 밖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후루야에게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후루야! 수업 안 듣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호통에 조금 놀라 죄송하다는 반응을 보이고선 책을 들여다보는 척을 했지만 그런다고 한들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볼걸.”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려본다. 아프냐고 물어보지 못했던 지난 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응어리가 지듯 몽글몽글 피어 올랐다. 그때, 책상 위로 툭 하고 꼬깃꼬깃 접힌 흰 종이가 날아들어왔다. 천천히 펼쳐본 종이엔 후루야군, 곧 점심 시간인데 같이 에이쥰군에게 가보지 않을래? 라는 내용이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종이가 날아온 곳을 바라보니 아니나다를까, 코미나토가 선생님의 눈을 피해 싱긋 미소 짓고 있다. 후루야는 코미나토가 건넨 종이를 다시 한번 또박또박 읽어보았다. 답을 하기 위해 쥐고 있던 연필을 종이에 가져다 댄다. 하지만 연필은 종이를 찍었다가 떨어졌고 다시 점을 찍었다가 떨어졌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후루야는 드디어 결심이 선 듯 끄적끄적 글씨를 적은 뒤, 고이 접은 종이를 코미나토의 책상 위에 툭 하고 던졌다. 코미나토는 잽싸게 종이를 집어 들고선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동글동글한 자신의 글씨 아래 후루야다운, 조금은 무성의한 글씨가 보인다.
[다녀와.]
읽을 것도 없이, 짧게 적어놓은 후루야의 대답에 코미나토는 픽, 답지 않게 헛웃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후루야는 방금 전, 선생님께 야단맞았던 사실을 그새 잊은 모양인지 좀 전과 같은, 멍한 표정으로 창 밖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임다!”
식당 안으로 떠들썩하게 들어서는 사와무라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어이, 사와무라. 죽을 뻔 했다면서? 에이, 저 얼굴 좀 봐. 죽을뻔한 얼굴이 아닌데? 말짱하구먼, 목소리도 여전히 크고. 모두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사와무라였다. 당연하죠! 감기 따위에 굴복하는 그런 나약한 사람이 아님다! 자, 말끔하게 다 나았으니 식사를 해보실까! 밥그릇에 한 가득 밥을 담는 사와무라를 코미나토가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 에이쥰군, 그 동안 계속 죽만 먹었잖아. 갑자기 많이 먹으면 탈나. 코미나토에게 웃으며 끄덕 없다고 말하는 그 옆얼굴을 후루야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떠냐고 물어봐야지,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는다. 그때였다.
“어이, 사와무라.”
“네?”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부르자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왜 불렀냐는 표정으로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향해 말똥말똥한 눈을 해 보였다.
“어쩌냐?”
“......?”
“네가 침대에서 죽치고 누워있는 동안 후루야는 엄청......엄청나게 열심히 연습했는데. 이로써 실력차가 더 벌어지는 거 아니야?”
미유키의 말이 끝나면 사와무라에게 몸은 좀 어떠냐고 물어보려 했던 후루야는 그 순간, 마시고 있던 물을 뿜을뻔했다. 약하게 사레가 들려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후루야의 귀에 분노로 가득 찬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한테 그러고 싶슴까! 성격 나쁜 거 자랑하냐! 아니, 그전에 며칠 연습 안 했다고 해서 실력차가 그렇게 확 벌어지지 않거든! 미유키 카즈야 이 자식! 두고 보자! 얼른 밥 먹고 운동장 뛰러 가야지! 후루야, 넌 또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질줄 알고!”
아닌데, 그게 아니라......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어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후루야의 앞에 사와무라는 식판을 내려놓으며 열불을 내기 시작했다. 연습을 열심히 했다, 이거지! 얼마나 했어! 설마! 설마! 밤도 샜냐? 비겁하다, 후루야! 삿대질까지 해가며 후루야를 닦달하는 사와무라에게 코미나토가 딴지를 건다. 에이쥰군, 솔직히 연습을 열심히 한 게 비겁한 일은 아니지. 그 말에 잠시 말 문이 막힌 듯 금새 고양이 눈을 해 보이는 사와무라였다.
“......좀......어때?”
“엥? 뭐라고?”
“몸은 좀......어떠냐고......”
아직 안 좋으면 더 쉬어. 머릿속에서 연거푸 되뇌었던 말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후루야의 입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사와무라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사와무라는 이를 악물고선 특유의 표정으로 콧김까지 내뿜으며 후루야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양주먹을 불끈 쥐고선 소리치기 시작했다.
“더 쉬어? 더 쉬어어? 내가 쉴 동안 또 혼자서 열심히 연습하려고 그러지! 누가 모를줄알고! 이겼다고 생각 마라, 후루야! 나도 오늘부터 죽도록 연습할거야!”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밥을 빛의 속도로 먹은 다음, 한 바퀴라도 더 뛰어야겠다!”
젓가락을 야무지게 움켜잡고선 그야말로 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후루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얼굴 위로 미소가 가득하다. 평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말에 울컥했던 적은 가끔 있었지만 그 모든 일들을 다 합쳐봐도 오늘만큼 미유키 카즈야, 그가 미웠던 날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후루야였다.
다소 지루했던 고전 수업이 막 끝난 참이었다. 시끌시끌한 주변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후루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벼락같이 울렸다. 자신을 이렇게 큰 소리로 부를만한 사람은 전교를 통틀어 단 한 명뿐이었기에 후루야는 창 밖으로 향해있는 시선을 굳이 거두지 않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내가 반응하지 않아도 코미나토가 곧 아는 척을 할 테지. 아니나 다를까 코미나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이쥰군, 웬일......하지만 코미나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다다다 뜀박질을 치는 소리가 온 교실에 울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후루야의 앞까지 달려온 사와무라는 과격하게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후루야! 이 자식아!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하라고! 무시하냐?”
“......”
그제서야 자신을 올려다보며 무슨 일이냐는 듯 눈빛을 쏘아대는 후루야에게 사와무라는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주머니에서 부스럭 무언가를 꺼냈다. 사와무라가 후루야의 코 앞에 들이민 것은 다름아닌 푸른색의 휴대용 아이스팩이었다. 후루야가 그것에 대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사와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안 그래도 큰 목소리를 한층 더 높이며 말했다.
“넌 약골이라 걸핏하면 더위 먹고 빌빌거리니까 이거 써!”
난 너랑은 달라서 이딴 거 필요 없거든! 널 밀어내고 에이스가 될 몸이니까! 후루야는 사와무라가 내민 아이스팩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러한 멋쩍은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책상 위에 아이스팩을 떡하니 올려놓으며 사와무라는 평소처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사와무라가 자신의 앞에서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은 정말 마음씨가 비단결 같다느니, 고마움을 알라느니 연신 쨍알거리는 사와무라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후루야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너......”
“......?”
“......시끄럽고......귀찮아.”
시끄럽고 귀찮아. 후루야의 말에 어벙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도 잠시, 사와무라는 곧바로 화를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교실 내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선 삿대질까지 해가며 분노하는 사와무라였다. 후루야! 이 자식! 남은 기껏 생각해서 들고 왔더니! 너 따위를 조금이라도 배려하려고 했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다! 착한 게 죄지! 후루야는 소란을 피우는 사와무라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후루야의 태도에 사와무라는 더욱더 길길이 날뛰려 했지만 예비종이 울리고 있었기에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심사가 꽈배기처럼 베베 틀린 놈아! 내가 두 번 다시 널 챙기면 사람이 아니다아아아! 반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사이렌처럼 울려대는 사와무라를, 한번쯤 쳐다볼 법도 한데 후루야는 끝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코미나토는 웃으며 후루야에게 다가가 후루야군, 에이쥰군은 널 생각해서 아이스팩을 가져온 모양인데 라는 말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코미나토가 말을 붙이기 전에 후루야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창 밖을 향하고 있던 무심한 시선이 책상 위에 놓여있는 아이스팩에서 멈춘다. 후루야가 그것을 집어 들어 교복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본 코미나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교과서를 펼치는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꾹 다문 입매 위로 아주 살짝, 미세한 기쁨이 맴돌고 있었다. 벙찐 얼굴로 후루야를 바라보고 있던 코미나토의 얼굴 위에도 슬며시 미소가 피어 오른다. 하긴, 솔직하지 못한 건 에이쥰군도 마찬가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