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길이라고 말하기엔 꽤나 늦은 밤 골목길을 걸어 서로의 집으로 향하던 중, 옆에서 걷고 있던 사와무라가 툭 하고 내뱉은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떠 보인 미유키였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와무라의 눈이 가늘게 떠져있었고, 얼굴 위론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난데없는 비난에 미유키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묻는다.
"다짜고짜 글렀다니? 네 무례함의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냐?"
아니면 그거......신종 사랑고백이야? 눈썹을 까닥이며 묻는 미유키를 향해 사와무라는 골목길이 울릴 만큼 큰소리로 아니야! 소리를 치곤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고백이라니! 진짜 글러먹었슴다! 그게 어떻게 사랑고백이야!
"이것 보십셔! 선배는 오늘 제가 가지고 있는 많고 많은 낭만 중 하나를 무참히 깨버렸다 이 말임다."
"......난 그딴 거 깬적 없는데."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표정엔 진심이 가득했다. 미유키의 말에 사와무라는 대번 세모눈을 뜨고선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댄다. 미유키 카즈야아아아! 내가 왜 당신이 정신줄을 놓고 다니는 바람에 잃어버린 지갑을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있어야 했는데! 학교에 두 사람이 남는 경우는 영화나 만화, 드라마에선 높은 확률로 낭만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이벤트라고! 평소 서로에게 마음은 있었지만 고백하기 전인 남녀 주인공이 허술한 경비 아저씨 때문에 교실에 갇힌다던가! 아, 그래! 영화 러브레터처럼 후지이 이츠키와 후지이 이츠키가 그랬듯이 자전거 페달을 돌려 전조등을 밝히는......밤의 학교는 그런 낭만이 가득한 장소인데 왜! 나는! 미유키의 지갑을 찾기 위해 교실과 복도 그리고 운동장에 엎드린 채 기어 다녀야 하는 검까! 내 낭만 어쩔 거야! 셔츠가 뜯어질 만큼 세게 멱살을 잡고선 분노하는 사와무라에게 언제나처럼 저기, 나 선배......의미 없는 저항을 해보는 미유키였다.
"그리고 사와무라......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낭만이라기 보단 밤의 학교에 사람이 남을 경우 귀신이 나타나거나 살인사건이 벌어지지, 안 그래?"
"글렀네! 답 없이 글러먹었네!"
미유키의 해석에 멱살을 놓으며 사와무라는 다시금 삿대질을 해댔다. 미유키는 특유의 싱글거리는 표정을 하고선 사와무라를 놀리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사와무라가 생각하는 낭만은 어째 너무 촌스러운데? 너무 뻔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거든? 그 말에 사와무라는 부들부들 떨며 어금니를 악물고선 중얼거렸다. 야구 바보가 믈 을겠슴끄......낭만이 므 으때스.......그 말에 미유키는 가볍게 소리를 내어 웃어 보인다.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본 것은 그때였다. 도쿄에선 잘 보이지 않는 별이 오늘따라 웬일로 밤하늘에 드문드문 박혀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어, 별이다 중얼거리자 부들부들 떨며 자신에게 대꾸할 말을 생각해내고 있던 사와무라의 동그란 머리통이 위를 향해 움직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본 사와무라가 잘난 척을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뭠까? 미유키. 저 정도로 놀람까? 저건 별 축에도 못 든다고요. 나가노에선 새까만 하늘 위에 점점이 박혀있는 별들이 마치 땅으로 쏟아져 내릴 정도임다. 늘 그렇듯이 자신의 고향인 나가노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는 사와무라였다. 생기 넘치는 얼굴로 나가노의 밤하늘에 대해 떠들어대던 입이 한 순간 다물어졌기에 미유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와무라는 여전히 밤하늘로 향해있는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언젠간......"
"......?"
"언젠간 말임다. 미유키에게도 보여주고 싶슴다."
"......뭐를?"
"청색이 도는 짙은 검은빛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는 그 광경을요."
분명 역시 네 낭만......너무 뻔하고 촌스럽잖아? 놀리기엔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사와무라의 그 말에 미유키의 얼굴 위로 서서히 미소가 번진다.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얼굴이 아래로 떨어지며 눈을 마주쳐왔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그 표정으로, 시원하게 웃는 입매를 하고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와무라를 향해 미유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운 느낌이었다. 심술궂게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서 그늘로 몸을 숨겼지만 공기 중에 가득한 열기까지 피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얼굴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고, 입고 있는 옷에도 땀이 스며든다. 상황이 이쯤 되자 미유키는 답지 않게 힘없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더워."
"미유키 카즈야......"
"응?"
"더우면! 좀! 떨어지란 말이다!"
이 삼복더위에 자신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선 등에 바짝 몸을 붙이고 앉아있는 미유키에게 결국 소리를 지르는 사와무라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이런 날씨에 꼭 이렇게 들러붙어있어야 직성이 풀림까!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했지만 미유키는 떨어질 생각이라곤 전혀 없는, 상큼한 표정으로 웃어 보인다. 아니야, 더위쯤은 뭐, 좀 참아볼게. 그 말에 대번 도끼눈을 떠 보이는 사와무라였다.
“참아보지마! 애초에! 댁이 참을만하다고 한들 내가 더워죽겠다고! 이거 놔!”
사와무라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미유키의 양팔을 떼어내려고 있는 힘껏 용을 써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허리를 끌어안은 팔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 좀! 급기야 손을 뻗어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을 밀어내며 사와무라는 외쳤다. 당장 떨어지지 못함까! 크악! 소리를 지르는 그 모습에 갑자기 표정을 싹 바꿔 정색을 하는 미유키였다.
"사와무라, 실망인데? 친구들과는 이렇게 잘만 붙어있더니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렇게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딱 붙이고 서있는걸 내가 다 봤는데......”
이익, 사와무라는 진심으로 짜증이 난 듯 이를 악 물곤 얼굴을 구겼다. 몇 시간 전, 점심시간의 일이었다. 사와무라는 매점 앞에 모여있는 반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고, 그 또래의 친밀한 스킨십이 자연스럽게 오고 가고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 서서 큰소리로 떠들며 웃고 있던 사와무라의 눈에 저 멀리 캔커피를 마시며 띠꺼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유키가 들어왔다. 그제서야 아차, 싶은 마음에 자신의 어깨와 허리를 감고 있는 친구들의 팔을 걷어냈지만 미유키의 표정은 여전했다. 가라앉은 눈빛에 사와무라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미유키에게 고개만 가로저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하여간 질투가 심하다니까. 사귀기 전엔 이렇게 질투가 많은 성격인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미유키였다. 그때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또 저를 놀리려고 든다는 생각을 먼저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당당한 그래서 가끔은 얄밉기까지 한 미유키 카즈야가 자신의 앞에 서서 상기된 얼굴로 말까지 더듬는 것을 보며 그 고백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사와무라는 그 어느 때보다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반 친구들과 붙어서 수다 좀 떨었기로서니 이렇게 들러붙어 질투를 해대는 미유키의 행동에 분통이 터지는 사와무라였지만 그가 고백을 했던 당시를 떠올리자 짜증을 내고 있었던 것도 잊고선 웃음을 터트렸다. 정색을 하고 있던 미유키는 왜 웃어? 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미유키, 꼴사납슴다.”
“뭐?”
“질투하는 거요. 꼴사나운데......한편으론 엄청 귀엽기도 함다.”
질투라니, 무슨. 얼굴을 찌푸리며 뒷머릴 긁적이는 미유키의 반응에 사와무라는 몸을 돌려 그를 와락 끌어안는다. 이러한 사와무라의 행동에 놀라 뒷머릴 긁적이던 손이 멈췄다. 미유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사와무라는 즐거운 듯이 말을 했다.
“그럴 거 없슴다.”
"......?"
“내가 사귀고 있는 건 미유키 카즈야, 당신 아님까? 그러니까 질투할 필요 없슴다.”
밝은 목소리로 말하곤 특유의 쾌활한 웃음소리를 내는 사와무라였다. 벙찐 표정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미유키 또한 웃으며 안겨온 사와무라를 끌어안았다. 정말 너는......끝말을 흐리며 미유키는 생각했다. 도무지 사와무라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화가 나도 결국 따스한 그 말 한마디에 모든 마음이 풀어진다. 질투할 것 없다는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사와무라."
"네?"
"그렇다면 친구들과는 못하는 걸 지금부터 해볼까?"
"뭘요? 야구요? 지금 휴식시간 아님까? 캐치볼 할까요?"
확실하게 던져 보이겠슴다! 신이 나서 일어서려는 사와무라를 잡아 자리에 도로 앉히며 미유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웅얼거렸다. 그거 말고, 사귀는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 말이야. 자신의 말에 멍청한 표정으로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던 사와무라가 갑자기 화악하고 얼굴을 붉혔다. 뭐......뭐라는 거야? 이 변태 포수야!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는 사와무라의 뒤통수를 손으로 살며시 감싸며 미유키는 점점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사와무라와의 거리를 좁혔다.
감기라니? 바보는 감기 안 걸리잖아.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미유키와는 달리 어째 쿠라모치의 표정은 심각하다. 그제서야 왜 그런 표정이냐는 얼굴로 쿠라모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미유키였다. 들고 있던 식판을 내려놓으며 쿠라모치는 한숨이 섞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웃을 일이 아니라고. 간밤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진짜 사와무라가 어떻게 잘못되는 줄 알았단 말이야. 하기야 나도 뭐, 처음엔 녀석이 코를 훌쩍이며 연신 기침을 해대길래 감기 따위나 걸리고 난리냐며 비웃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밤새도록 죽어라 앓아대지 뭐야. 결국 타카시마 부부장이 이른 새벽부터 기숙사에 들러 병원에 데려갔어. 오늘 연습은커녕, 수업도 못 들어갈 거다.”
밥 먹으러 오기 전에 보니까 시체 같은 몰골로 병원에서 돌아와 약 먹고 바로 눕던데 괜찮은지 모르겠네. 하루도 빼먹지 않고 타이어를 허리에 매고 달리고, 새벽까지 남아서 투구 연습을 해대면서도 기운이 넘치다 못해 폭발을 하더니......얼굴을 찡그리며 사와무라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쿠라모치를 향해 미유키는 짓궂은 목소릴 내기 시작한다.
“애절하다, 애절해. 쿠라모치, 후배를 걱정하는 네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서 밥이 안 넘어갈 지경인데? 어디 보자, 가슴은 안 찢어졌어?”
미유키가 고개를 쭉 빼고선 자신의 가슴 부근을 들여다보자 쿠라모치는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이, 미유키. 좀 솔직해져라.”
“......?”
“나한테 아침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사와무라는 어디 있냐고 물어온 게 누군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사와무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놈이......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하여간 갑갑하다니까. 가차없이 쏟아지는 비난에 미유키는 내가 언제 그랬냐고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곤 뒷머릴 긁적였다. 쿠라모치의 말대로 매일 아침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큰 소리로 인사하는 사와무라가 보이질 않자 단박에 물어본 건 사실이었으니까. 감기라는 말에 농을 쳤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밀려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와무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쿠라모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속마음과는 달리 말과 행동은 늘 정반대였기에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바보 같은 제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다. 사와무라의 솔직함을 반에 반만 닮아도 좋으련만......부질없는 가정을 하며 미유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되면 들러보던가? 쿠라모치의 말에 미유키는 그럴 것까지야 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쿠라모치도 포기한 듯 말을 길게 덧붙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5호실에 찾아가 사와무라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한발자국 물러섰다. 사와무라를 향한, 애정이 분명한 그 마음에 거리를 두는 미유키였다. 사와무라가 아프다는 소리를 들은 뒤론 뭘 해도 집중이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창 밖을 내려다보거나 쉬는 시간에도 스코어북을 펼쳐놓고선 멍한 표정으로 응시만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연습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기에 조노가 쿠라모치에게 저 녀석 왜 저렇게 얼이 빠져있냐? 라고 물어올 정도였다. 물론 이 질문에 쿠라모치는 시니컬한 목소리로 바보라서 그래, 바보라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했고, 조노의 궁금증은 풀리긴커녕 커져만 갔다. 공을 받고 있던 미유키가 갑자기 일어나 오노를 부른 건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오노.”
“응?”
“잠시만 공 좀 대신 받아줘. 잊은 게 있어서 기숙사에 다녀올게.”
“지금?”
“응,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오노에게 말하며 보호대를 벗는 미유키와 타격 연습을 하고 있던 쿠라모치의 눈이 딱-하고 마주친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쿠라모치의 모습에 미유키는 잠시 당황했지만, 둘러댈 틈도 없이 픽,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고선 다시금 배트를 휘두르는 쿠라모치였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아니었으면 답지 않게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이다.
쿠라모치는 알아차린 듯 했지만, 잊은 게 있어 기숙사에 다녀오겠다는 것은 사와무라의 상태를 제 눈으로 살펴보기 위해 대충 둘러댄 말일뿐이었다. 5호실의 문 앞에서 살짝 심호흡을 한 미유키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사와무라, 좀 어때? 괜찮아?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며 들어선 5호실은 불이 꺼져 있었고, 늘 시끄러운 평소의 분위기완 반대로 적막이 가득했다. 잠시 불을 켤까 싶었지만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와무라가 잠들어있는 듯 보였기에 손을 거두어들인다. 소리가 나지 않게 방안으로 들어온 미유키의 눈이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제서야 미동 없이 침대에 모로 누워있는 사와무라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까지 다가갔음에도 사와무라는 꼼짝 않고 누워있었는데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미유키는 한숨을 쉬며 옆에 놓여있는 수건을 들어 조심스레 땀을 닦아 주었다. 이마에 손등을 살짝 대었을 때 적잖이 후끈했기에 미유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펄펄 끓잖아. 약은 먹고 자는 거야? 욕실로 가 수건을 차갑게 적신 미유키는 모로 누워있는 사와무라를 조심스레 반듯하게 눕힌 다음, 이마 위에 수건을 올려주었다.
그 녀석, 자기말론 원체 건강해 이렇게 골골대는 일이 거의 없는데, 어쩌다 한번 아프면 호되게 앓는 체질이라더라. 쿠라모치의 말을 떠올리며 미유키는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다소 거친 숨을 내쉬며 기절한 듯 잠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미유키의 시선이 사와무라의 오른팔로 향한다. 얼룩이 져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여다본 오른팔 안쪽은 시퍼런 멍으로 가득했고, 손등에 붙어있는 반창고로 보아선 링거 주사를 맞을 때 혈관이 잘 잡히지 않아 주사 바늘을 여러 번 찔렀다 뺏다 한 모양이었다. 미유키는 저도 모르게 사와무라의 왼손을 깍지 껴 잡으며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손등 위는 땀이 배어있어 끈적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만약 사와무라가 깨어있었다면 본심과는 달리 그를 놀리며 화를 돋았을 테지만, 그가 깊이 잠들어있는 지금 이순간만큼은 달랐다. 손등에 입맞추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미유키였다. 맨날 시끄럽다고 놀리고 구박했는데, 이렇게 아플 바엔 차라리 시끄러운 게 백배 낫겠다.
“......사와무라.”
“......”
“좋아해. 네가 좋아.”
“......”
“나도 알아,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공 받아주십셔! 라고 외치는 그 해맑은 얼굴에다 대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요하는 것인지.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직설적이고, 무서운 것 없는, 천하의 미유키 카즈야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속마음과는 다르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사와무라를 눈으로 좇으며 집착하고 그의 주변을 질투하는 자신이었다. 손등에 대고 있는 입술을 떼지 않으며 미유키는 좋아해, 좋아하고 있어, 좋아한다 연거푸 속삭이며 사와무라를 향한, 이러한 고백을 언젠간 직접 건넬 수 있길 빌어보았다. 이런 비겁한 꼴이 아닌, 당당한 모습으로.
“좋은 아침임다!”
식당 안으로 떠들썩하게 들어서는 사와무라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어이, 사와무라. 죽을 뻔 했다면서? 에이, 저 얼굴 좀 봐. 죽을뻔한 얼굴이 아닌데? 말짱하구먼, 목소리도 여전히 크고. 모두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사와무라였다. 당연하죠! 감기 따위에 굴복하는 그런 나약한 사람이 아님다! 자, 말끔하게 다 나았으니 식사를 해보실까! 밥그릇에 한 가득 밥을 담는 사와무라를 코미나토가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 에이쥰군, 그 동안 계속 죽만 먹었잖아. 갑자기 많이 먹으면 탈나. 끄떡없다고 대꾸하는 사와무라에게 미유키의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팔 안쪽 한 가득, 시퍼렇게 들어있던 멍이 어느새 진해져 검보라빛을 띠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미유키의 미간이 아주 살짝 좁혀진다.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건지 밥을 담다 말고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봅니까? 라고 물어오는 듯한 눈빛에 미유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이, 사와무라.”
“네?”
“어쩌냐?”
“......?”
“네가 침대에서 죽치고 누워있는 동안 후루야는 엄청......엄청나게 열심히 연습했는데.”
이로써 실력차가 더 벌어지는 거 아니야? 미유키와 마주 앉아있던 쿠라모치의 얼굴 위로 경악이 번졌다. 쿠라모치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사와무라는 쥐고 있던 주걱을 밥솥에 푹 꽂으며 분노가 들끓는 얼굴을 하고선 소리치기 시작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한테 그러고 싶슴까! 성격 나쁜 거 자랑하냐! 아니, 그전에 며칠 연습 안 했다고 해서 실력차가 그렇게 확 벌어지지 않거든! 미유키 카즈야 이 자식! 두고 보자! 얼른 밥 먹고 운동장 뛰러 가야지! 후루야, 넌 또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질줄 알고! 전날까지 아파서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펄펄 뛰며 열을 내는 사와무라였다. 쿠라모치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소리 없이 미유키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너 진짜 못됐다. 쿠라모치의 반응에 미유키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선 고개를 돌려 어느새 자신을 향해있던 분노를 후루야에게 퍼붓고 있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몸 상태는 많이 좋아진 모양이다. 기운이 넘쳐 보이는 사와무라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유키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걸린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35도의 날씨. 그렇기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타이어를 허리에 묶은 채로 고집스럽게 내달리던 사와무라가 쓰러진 건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실내연습장 구석에 누워 얼음물을 적신 수건을 얼굴에 덮고선 숨을 고르고 있는 꼴이 한심하기 그지 없었기에 사와무라가 누워있는 곳 주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으며 미유키는 그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잘한다, 내일 경기가 있으니 몸은 적당히 풀라는 말을 도대체 왜 안 듣는 거야? 그렇게 마구잡이로 달린다고 안 좋은 실력이 단숨에 늘어? 여기까지 말을 하자 얼굴을 덮고 있는 수건을 밀어 올리며 분노하는 사와무라였다.
“아! 정말 시끄럽네! 상관마십셔!”
이쯤 되자 늘 여유가 넘치는 미유키도 열이 올라 지지 않고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누구보고 시끄럽다는 거야? 네가 더 시끄럽다! 어떻게 상관을 안 하냐? 이 바보 같은......아니, 바보 같은 게 아니라 그야말로 바보가 팀 발목을 자꾸 잡는데. 살다 살다 너처럼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도 처음이다 처음.
“크리스 선배가 적당히 하라고 말했어도 네가 이랬겠어?”
“크리스 선배랑 당신이랑 같슴까?”
크리스 선배가 적당히 하라고 말했어도 네가 이랬겠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 치는 사와무라의 반응에 미유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려온다.
“......같지 않으면 뭐가 다른데?”
크리스 선배도 선배, 나도 네 선배 아니야? 선배도 포수, 나도 포수, 넌 투수라는 것도 같잖아? 안 그래? 그 순간 어색한 침묵이 공기를 감싸 안았다. 평소엔 조용히 하라고 그렇게 구박을 해도 굴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주제에 이러한 질문엔 교묘하게 입을 다무는 사와무라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미유키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미유키는 알고 있었다. 은근슬쩍 흘리듯 내뱉은 자신의 질문에 사와무라가 대답할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입을 다물고 누워있는 사와무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미유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었다.
“......됐다. 충분히 쉬다가 나와.”
조금만 쉬다가 가겠슴다. 천하의 사와무라 에이쥰, 이정도 더위엔 끄떡없슴다! 물 먹은 솜처럼 축 쳐져서 누워있는 주제에 입만 살아 외쳐대는 것이 평소와 다름이 없어 미유키는 웃으며 그래, 그래, 야구를 못하면 말이라도 잘 해야지 라며 핀잔을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미유키 카즈야! 이 자식!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사와무라를 뒤로 하고선 웃으며 밖으로 걸어나가는 미유키였다.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서려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