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늦여름이라지만 여름이라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피터 파커는 청바지와 반팔 티셔츠 그리고 허름한 가방을 등에 멘 채로 무언가를 한참 동안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엔 누군가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놓은 커다랗고 붉은 거미 형상의 그래피티 아트가 있었다. 두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선 붉은 거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피터에게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말을 걸어온다.
“나는 알아.”
“뭘 말이야? 꼬맹아.”
꼬맹이라고 부르지마. 내 이름은 호르헤라고. 툴툴거리며 옆으로 다가온 소년, 호르헤는 따돌림을 당하던 자신을 구해준 스파이더맨을 동경하고 있었다. 스파이더맨과 만난 후로 끈질기게 그를 쫓아다녔고, 결국 자신이 동경해 마지않는 스파이더맨의 정체가 동네에서 종종 마주쳤던 적이 있는 피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낡은 안경을 삐딱하게 쓰고선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을 겁먹은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울먹이고 있던 호르헤의 옛모습이 떠올라 피터는 피식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당시 호르헤의 모습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많이 닮아있었으니까. 머리를 쓰다듬자 호르헤는 피터의 손을 뿌리치며 날이 선 목소리로 따져 묻는다.
“가방에 들어있는 가면과 옷을 저 거미 아래에 묻으려는 속셈이지? 이제 다시는, 영원히 사용할 수 없게.”
호르헤의 말에 피터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히익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뭐야? 너 독심술사야? 태평스럽게 장난이나 치고 있는 피터가 야속했던 모양인지 호르헤는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한번 세게 찌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형의 바보 같은 얼굴을 조금만 지켜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무슨 생각이야? 아직 세상은 스파이더맨이 필요…..”
“그래, 맞아. 필요해.”
“……….”
“하지만 꼭 나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
“……….”
“뒤로 물러설 때가 온 것 뿐이야.”
“…..물러서면? 형이 물러서면 이젠 누가 우릴 지켜주는데?”
호르헤의 목소리엔 울음이 번지고 있었다. 눈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기에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피터 역시 콧등이 시큰해졌다.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기에 몇 번 크게 기침을 한 피터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호르헤와 시선을 마주했다.
“스스로 지켜야지. 만약 그러지 못할 상황이 오면…..”
“……….”
“또 다른 영웅이 나타날 거야. 나보다 더 멋지고, 더 훌륭한…..”
“내 영웅은….스파이더맨, 오직 형뿐이야.”
“.....고맙다.”
고맙다는 말에 호르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세상이 끝난 듯 울음을 터트리는 호르헤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린 뒤, 피터는 붉은 거미의 아래로 걸어가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들고 온 가면과 옷을 넣었다. 그 위를 흙으로 단단히 덮으며 언젠가 벤 삼촌이 자신에게 남겼던 음성메시지를 되뇌었다. 피터, 넌 어려서부터 아주 많은 의문을 갖고 살아왔지. 이 노인네의 말을 믿으렴. 그 의문들이 바로 삶의 원동력이자 우리의 본질이야. 위대해질 운명을 갖고 태어난 아이. 바로 ‘너’란다. 네가 가진 능력을 세상을 위해 쓰렴. 그 방법이 뭐가 됐든지 삼촌과 숙모는 널 응원할거다. 넌 내 영웅이야. 사랑한다. 순간 울컥하고 감정이 치밀어올라 피터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붉어진 눈으로 스파이더맨의 상징을 묻은 흙더미를 손으로 짚으며 피터는 생각했다. 스파이더맨 가면을 쓴 뒤, 잃은 것들이 많았다. 가족, 연인, 친구.....하지만 얻은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며, 피터는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넌 내 영웅이야. 자신을 영웅이라고 말한 벤 삼촌을 떠올리며 피터는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벤 삼촌, 그거 아세요? 삼촌은 저를 영웅이라 불렀지만 사실 제 영웅은 삼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실 알고 보면 그 누군가의 영웅이라는 것을.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 이순간이 자신이 쓰고 있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그때였다. 오늘따라 유독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커다란 붉은 거미를 바라보며 피터는 씁쓸하게 웃으며 등을 돌린다. 입술 사이로 물기가 서린,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