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님(@vtymi) 생일 축전으로 드리려고 쓴 짧은 글. ^^; 미쿠라도 맛있네요. 녑녑녑~
헤어진 연인과 재회를 하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퇴근 시간, 사람들로 북적이는 승강장 안에서 익숙한 얼굴과 마주하기 전까진 이러한 생각은 어렴풋한 망상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상대 또한 자신을 발견하고선 놀란 듯 눈을 크게 뜸과 동시에 얼굴 위로 감춰지지 않는 망설임이 스치는 걸 보며 미유키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기분이구나. 알겠다는 듯 중얼거리긴 했지만 몇몇 단어들만으로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표현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저 멀리서 미유키를 바라보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쿠라모치 요이치는 이제 와서 고개를 돌려 못 본 척을 하기엔 늦었다고 판단을 했는지 짧은 한숨을 내쉬곤 어색한 걸음으로 미유키가 앉아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쿠라모치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미유키는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인사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잘 지냈어? 요즘 어떻게 지내? 여전히 회사는 바빠? 그러나 애써 떠올린 수십 가지의 인사말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쿠라모치의 짧은 인사에 머릿속에서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어이, 미유키."
너무나도 그다운 인사였기에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이 상황에서 미유키의 입술 사이로 어울리지 않게 픽 하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뻣뻣한 얼굴을 하고 있던 쿠라모치가 살짝 인상을 쓰며 몇 년 전처럼 틱틱거리는 목소리를 낸다.
"뭐냐? 사람이 인사를 했는데 웃고 난리야."
"아, 미안. 그냥......"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미유키의 이 말에 쿠라모치는 대번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진다. 변한 게 왜 없냐?
"......엄청나게 변했지."
"......"
"너도, 나도."
엄청나게 변했지. 쿠라모치의 말 속에 숨어있는 속뜻을 모를 만큼 미유키는 둔하지 않았다. 미유키와 쿠라모치, 두 사람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쿠라모치의 말대로 두 사람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고선 그렇게 떨어져있었으니까. 자신의 말에 착잡한 표정을 짓는 미유키를 내려다보며 쿠라모치는 다시 한 번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미유키가 앉아있는 긴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바로 옆이 아닌 한명분의 자리가 남게끔 거리를 두고서. 앉자마자 갑갑하다는 듯이 목에 매고 있는 넥타이의 끈을 느슨하게 풀며 쿠라모치는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다. 집에 가는 길이야? 내가 탈 열차는 10분 뒤에나 온다고......아무렇지도 않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 있는 쿠라모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미유키의 머릿속에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 전인 고등학교 시절이 자꾸만 떠오른다. 정확히는 고등학교 시절, 빛 바랜 어느 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무렵, 사랑 고백이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뒤뜰과 빈 교실에 불이 나도록 남녀가 마주하고 서 있었고, 편지가 오고 가고, 행복한 얼굴로 웃었으며 또는 고개 숙여 눈물을 닦아내곤 했다. 이러한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미유키조차 눈치를 챌 만큼 교내엔 들뜬 마음이 가득했다. 미유키와 쿠라모치가 단둘이 빈 교실에 남아 스코어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날도 그때 즈음이었다. 스코어북을 보며 경기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하던 중, 미유키의 눈에 창문 밖 뒤뜰의 남녀가 들어왔다. 아마도 여자 쪽이 고백을 하는 입장인지 얼굴이 붉디붉었다. 들리진 않지만 꾹 다물어진, 미미하게 떨리는 입가를 보아선 고백의 말을 꺼내는 것이 힘든 모양이었다. 끝내, 마주하고 서있던 남학생이 무어라 짧은 말을 내뱉곤 등을 돌려 가버린다. 붉은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릴 정도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미유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렵네.]
[......? 뭔 소리야?]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 물어오는 쿠라모치를 바라보며 미유키는 고개를 까닥여 창문 밖을 가리킨다. 창문 밖을 내다본 쿠라모치는 특유의 빠른 눈치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곤 고개 숙여 울고 있는 모습이 꽤나 안타깝다는 듯이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우는 여자를 놔두고 그냥 휙 가버린 거냐?]
인정사정없는 놈이네. 아무렇게나 내뱉는듯했지만 쿠라모치 특유의 안타까움과 다정함이 묻어났기에 미유키는 웃으며 말했다.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고 우물거리는 게 답답했나 봐.]
[이왕 용기를 내서 불러냈다면 고백도 시원스레 해버릴 것이지......]
뒤뜰에 우두커니 서서 연거푸 눈가를 닦아내는 모습이 영 딱한 모양이었다. 창문 밖으로 향해있는 시선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에 미유키는 들고 있던 펜을 놓으며 물었다.
[넌 어때? 시원스레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아? 너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 나라면......]
[......]
[일단 놓치지 않게 손에 힘을 줘서 옷을 꽉 잡은 뒤, 이렇게 말할 거야. 좋아한다고.]
[......]
[옷을 잡은 손을 놓게 될지, 혹은 마주 잡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잡을 거야.]
[이렇게?]
미유키가 쿠라모치의 교복 셔츠를 잡은 건 그때였다. 여유로운 표정과 목소리와는 달리 셔츠를 잡은 손이 미미하게 떨린다. 난데없이 셔츠를 잡아온 미유키의 행동에 쿠라모치는 하던 말을 멈추곤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잡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는 거야? 되묻는 미유키의 목소리에 한참을 크게 뜬 눈으로 멍하게 있던 쿠라모치의 입에서 픽 하고 힘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걸 바로 써먹냐? 너라는 놈은......]
[......]
[......좋아한다는 말은 어디 갔다 팔아먹었어?]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웅얼웅얼 말을 흐리는 쿠라모치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미유키는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뭐야? 듣고 싶어? 놀리듯 물어오는 목소리에 쿠라모치는 얼굴을 구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이 망할 놈아! 얼굴을 구기며 소리를 지른 것도 잠시, 어느새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피식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유키의 손은 쿠라모치의 셔츠를 잡고 있었다.
"그럼 잘 있어라."
미유키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던 사이, 기다리던 열차가 승강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기에 쿠라모치는 짧은 작별인사를 건넸다. 승강장에 멈춘 열차를 타기 위해 쿠라모치는 몸을 일으킨다. 잘 있어라, 내뱉은 목소리가 초조하리만치 태연하게 들렸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미유키는 쿠라모치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나 그가 걸치고 있는 윗옷의 끄트머리를 반사적으로 움켜잡았다. 옷을 잡힌 탓에 걸음이 멈춘 쿠라모치는 놀란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렇게 헤어지면 다음은 언제일까? 사실 다음이라는 것은 영원히 없을지도 몰랐다. 쿠라모치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미유키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나온다.
"이렇게......"
"......?"
"이렇게 잡는 거라며?"
"......"
"놓치지 않게, 손에 힘을 줘서, 이렇게......"
쿠라모치가 기다리고 있었던 열차는 곧 승강장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제 윗옷을 움켜쥔 미유키의 행동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쿠라모치는 마찬가지로, 과거의 어느 순간이 떠오른 모양인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해 보인다. 옷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려는 듯 강하게 잡은 것도 잠시, 미유키의 손을 잡고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태워야 할 사람을 승강장에 남겨둔 채로. 쿠라모치의 입에서 난감하기 짝이 없는,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옷 구겨져, 망할 놈아. 열차가 철로 끝으로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미유키는 쿠라모치의 옷을 붙잡고 그렇게 서 있었다.
봄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잊을만하면 추적추적 비를 뿌려대곤 했지만 올해는 그 정도가 심했다. 아무리 전날 내일의 날씨를 확인한다 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기상청에서 떠들어댄 정보대로라면 햇볕을 내리쬐어야 할 하늘이 삽시간에 우중충한 얼굴로 변해 비를 쏟아내곤 했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오늘도 조금 전까지 화창했던 날씨가 거짓말이라는 듯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기에 나루미야 메이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서선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아,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부실에 들르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갈걸.”
미루고 미루다 대본을 가지러 며칠 만에 부실로 간 것이 화근이었다. 대본만 가지고 나올 심상으로 살금살금 들어간 부실엔 하필이면 부장인 미유키가 남아있었고, 그대로 꼼짝없이 붙잡혀 다음 달에 있을 연극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늦은 하교를 하게 된 나루미야는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진 맑았잖아!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 한들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그치진 않았다. 사실 평소라면 우산 따윈 없어도 무방했다. 심드렁한 얼굴로 건물 입구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여자들 중 누군가가 다가와 나루미야군, 혹시 우산 안 들고 온 거야? 라던지 나루미야 선배,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라며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우산을 내미는 상황이 펼쳐졌을 테니까.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짧게 말하곤 웃어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자들은커녕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기에 나루미야는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고선 비가 쏟아지고 있는 바깥을 향해 걸어나갔다. 뭐, 비 조금 맞는다고 어찌 되는 건 아니니까. 머리털이 걱정되긴 했지만 말이다.
나루미야의 집은 학교로부터 도보로 15분 거리의 주택가 중 한 곳이었다. 버스 등의 교통수단으로 통학하는 다른 학생들보단 가까운 편이었지만 걷기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교복은 물론이요, 속옷까지 싹 다 젖을 만큼 퍼부어대는 비를 맞고 있자니 15분 거리도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택시 탈 걸! 이왕 쫄딱 젖어버린 거 지금에 와서 택시를 잡아타는 것도 웃긴 일이었기에 나루미야는 투덜거리며 애꿎은 물웅덩이를 발끝으로 퍽퍽 찼다. 그때, 누군가가 뒤쪽에서 두다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나루미야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이 눈 안 가득 들어오며,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던 비가 한순간에 그쳤다.
“메이 선배, 꼴이 이게 뭠까?”
꼴이 이게 뭐냐고 묻는 것과는 달리 얼굴은 해사하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얼굴을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루미야는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야, 사와무라. 꼴이라니? 이게 진짜......너 자꾸 선배랑 맞먹지?”
“연극부의 왕자님이 비 맞은 생쥐 꼴이니 그렇지요. 선배 팬들이 이 꼴을 보면 죄다 떨어져 나가겠슴다.”
“야! 여자들이 떨어져나가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없슴까?”
상관있지요! 누가 뭐래도 선배는 우리 연극부의 상징이자 자랑! 그 유명한 연극부의 왕자님 아님까? 평소에도 이렇게나 소속부를 생각하고 생각하는! 성실하고 야무진 남자! 사와무라 에이준! 거리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크게 외쳐대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시원스레 웃어 보이는 사와무라였다. 그 모습에 나루미야 또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사와무라가 우산을 들고 있었기에 나루미야는 그가 걷는 속도에 제 걸음걸이를 맞추며 삐죽삐죽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꼴이 이렇다고 떨어져 나갈 애들을 내가 왜 신경 쓰냐?
“어차피 그런 애들은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는 건데......”
“아, 그건 맞슴다. 선배는 외모 빼면 시체니까요. 성격도 더러운 데다가, 밉살스러운 말도 아무렇지 않게 툭툭 해대지 않슴까? 그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
“죽을래? 이게 진짜?”
열 받는다는 얼굴을 하고선 나루미야는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사와무라의 볼을 꼬집어 잡곤 흔들었다. 므아아으! 사람 살려! 교내폭력! 죽는소리를 내는 사와무라가 얄미워 좀 더 손에 힘을 줘 보이는 나루미야였다. 교내폭력? 지금 학교 밖이거든? 한차례 호된 응징을 당한 사와무라가 벌건 볼을 어루만지며 외쳤다. 왕자는 무슨 왕자야! 이 악마! 진심으로 꼬집었죠? 금발 머리! 홀라당 벗겨져라! 아직도 혼이 덜 낫구나 싶어 이번엔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는 저 입을 잡아 흔들어줘야겠다 생각하며 나루미야는 도끼눈을 떠보았지만 입을 잡고 흔들기도 전에 푸스스 웃음기가 섞여 있는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농담임다, 농담. 모르긴 해도 선배 외모만으로 팬클럽이 생겼겠슴까? 선배가 인기 있는 건 외모도 외모지만 연기를 잘해서겠지요.”
“당연한 소리를 하고있......”
“좋아함다.”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에 나루미야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좋아합니다. 몇 번이나 상상한, 꿈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그 말이었다. 실제로 사와무라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상상보다 담백했고, 꿈보다 더 모호하고 흐릿했다. 나루미야가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와무라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선배 연기 진짜 좋아한다고요. 왜 그거 있잖슴까? 막 연극부에 들어왔을 때, 처음 본 선배의 연기 진짜 멋있었슴다. 지금도 그 순간이 잊혀지질 않을 정도라니까요! 그러니까......분명 작품명이......”
뭐야? 연기가 좋다는 말이었어? 이렇게나 김이 빠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사와무라를 쳐다보고 있던 나루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관의 아리아를 말하는거냐?”
“맞슴다! 그검다! 거기서 선배 연기 진짜 일품이었슴다. 평민을 사랑하게 된 공주 아리아가 결국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걸 포기하고선 이웃나라의 늙은 왕에게 시집가겠다고 말하는 그 다음 장면 말임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떠나기 위해 어두운 망토를 걸치고 성을 뛰쳐나가 숲을 가로지르는 공주의 머리 위로 달빛이 쏟아지고......”
“숲의 왕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지.”
“거김다! 거기! 그때 숲의 왕자 역이었던 선배가 은은한 조명 아래 등장해서 아리아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 말임다!”
아리아 공주, 그대의 아름다움이 슬픔에 잠겨 빛을 잃었군요. 사와무라는 마치 자신이 숲의 왕자가 된 마냥 몰입해 대사를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심하게 몰입했는지 들고 있던 우산을 들썩거릴 정도였기에, 우산에 맺혀있던 빗물이 후두둑 나루미야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야! 물 떨어지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나루미야의 반응에 아, 그렇슴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한 사와무라가 이내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배는 언제나 멋있지만 관의 아리아에선 특히나 더 멋있었음다.”
연방 자신을 멋있다고 칭찬하는 사와무라의 말에 나루미야는 들리지 않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와무라가 하는 칭찬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 나루미야가 제일 잘 알았다. 다른 의도라곤 전혀 없는 순수한 칭찬. 사와무라는 상대의 장점을 끌어내어,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곤 용기를, 자신감을 북돋아 준다. 분명 이러한 면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사는 거겠지 라는 생각에 미치자 나루미야의 머릿속에서, 짧지만 분명한, 사쿠마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사와무라에게 고백하려고.]
저도 모르게 나루미야는 얼굴을 구겼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입을 다문 자신을 사와무라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루미야가 황급히 말을 돌린다.
“너 있잖아. 보통 남자애들은 아리아역을 맡았던 타카코 선배 이야길 훨씬 더 많이 한다고.”
“아, 물론! 타카코 선배도 아름다웠슴다! 하지만 그날의 선배는 이상하리만치 반짝반짝 빛이 났다고요.”
“......”
“아름다운 장면이었슴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어색하진 않았다. 시원하게 퍼붓는 비 덕분에 주변은 온통 회색과 탁한 푸른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 계속된다. 짧은 침묵 끝에 나루미야가 천천히 입을 연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래, 아름다운 장면이었어.
“그렇지만 말이야, 아리아는 끝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다운 고백도 못 해보곤 이웃 나라로 시집을 가버리잖아. 그리곤 그곳에서 쓸쓸히 죽어간다고. 그 각본, 잘나신 부장, 카즈야가 쓴 건데 진짜 구렸거든? 뭐 그런 엔딩이 다 있냐? 성격 나쁜 거 각본에 대고 자랑을 하는 거야? 뭐야?”
“뭠까? 미유키 카즈야가 성격이 나쁘다는 말엔 동의하지만 선배가 할말은 아니잖......”
“야!”
대번에 나루미야가 휘둘러대는 주먹을 잽싸게 피한 사와무라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주먹을 피하기 위해 몸의 절반 이상이 우산 밖으로 빠져나가 쏟아지는 비를 맞아버렸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그 각본, 현실적이라 좋지 않슴까?”
“......뭐가?”
“고백하지 못하는 사랑도 분명 존재하니까요.”
“......”
“그렇잖슴까? 뭐 연극이나 영화, 만화 속에서야 주인공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에선 고백하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많잖슴까. 도무지 입이 안 떨어진다니까요?”
“......의외다?”
“뭐가요?”
“너 말이야, 너. 고백이 어렵다고 말하는 게 의외라고. 넌 단세포에 머리도 나빠서 그냥 앞뒤 안 가리고 그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고백한 뒤, 잔인하게 차일 것 같은 이미지라......”
“아니야! 이 금발아!”
누구 머리가 나쁘다는 거야! 그리고 왜 당연한 것처럼 차일 거라 생각하는데! 그것도 잔인하게! 진짜 사람이 왜 이렇게 못 되먹었슴까아아아! 붉그락푸르락 얼굴색을 바꿔가며 방방 뛰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나루미야는 신난다는 듯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뭐가 웃김까아아아! 사와무라가 사정없이 우산을 흔들며 분노했기에 온 사방에 물이 튀기 시작했다. 야! 물 튄다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루미야는 우산을 뺏어 들었다. 우산을 뺏기고도 방방 뛰던 사와무라가 입술을 쭉 빼고선 나루미야를 째려보며 기운 빠지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참나, 이래서 선배가 재수 없다는 검다. 뭐......인정......인정하긴 싫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으으으으 부들거리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 실소도 잠시, 이어지는 사와무라의 말에 나루미야는 착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가 어떻게 알겠슴까? 분명 이런 고민 따윈 해본 적도 없겠지요?”
선배의 반만 멋있어도 쉬울 텐데 말임다. 우물거리는 사와무라의 말에 나루미야는 반사적으로 대답할뻔했다. 나 안 멋있어. 목젖까지 치고 올라오는 말을 간신히 도로 집어삼키며 나루미야는 들키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멋있다는 거야? 답지 않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사와무라는 활기가 넘치는 얼굴로 다음 달에 있을 연극제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눈으로 흘끔 바라보며 나루미야는 며칠 전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날을 떠올린다. 멋있기는커녕 지지리도 못났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수업이 막 끝난 쉬는 시간, 교실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얼른 사와무라군에게 물어보자. 늘 함께 붙어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삼인방 중 한명인 사토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왔기에 물먹은 솜처럼 책상 위에 힘없이 엎드려있던 사와무라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반쯤 뜬 눈으로 사토를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삼인방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흘끔흘끔 사와무라를 바라보다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까르르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데 그러냐? 삐죽거리며 물으려던 참에 세 명의 여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쪽으로 먼저 다가왔다.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을 미루던 것도 잠시, 시원시원한 성격인 스즈키가 대뜸 손에 들고 있는 만화책을 들이밀며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사와무라군, 실례일 수도 있지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후루야군 닮지 않았어?]
만화책? 주인공?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든 만화책의 표지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쯤 감겨있던 눈이 서서히 크게 떠졌고, 사와무라는 에엣? 큰소리를 내며 만화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야! 스즈키! 남자 둘이서 이게 무슨 망측한 행......읍읍읍.]
소란스러운 사와무라의 반응에 스즈키는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그리고 훤히 다 보이게 들지 말라고! 당당하게 보여줄 땐 언제고 조용히 하라니? 훤히 보이게 들지 말라고? 얼척없다는 얼굴을 해보이고선, 사와무라는 만화책의 표지로 눈을 돌렸다. 표지엔 남색이 언뜻언뜻 비치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붙잡아 깔아 눕히고선, 상대의 옷을 뜯어버릴 듯이 우악스럽게 벗기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있었다. 이게 뭐야? 왜 죄 없는 옷을 잡아뜯는 거야! 이게 무슨 짓인데? 그리고 갈색머리 너 인마! 싫으면 주먹을 날리거나 사타구니를 걷어차야지! 왜 얌전히 깔려있는 거야! 아니, 이게 아니라! 사와무라는 엉뚱하게 흐르는 생각을 다잡으며 다시 한 번 표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표지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성인본 표시를 확인한 사와무라는 이게 뭐냐는 듯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삼인방......그러니까 스즈키, 사토, 모리를 차례대로 쳐다봤다. 늘 수줍음을 타는 모리는 스즈키와 사토 뒤에 숨어 평소에도 발그레한 얼굴을 더욱더 붉은 빛으로 활활 태우고 있었고, 사토는 옆에 서있는 스즈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러댔다. 흠, 흠, 어색한 소리를 몇 번 낸 스즈키는 뭐가 문제냐는 듯 팔짱을 끼고선 말했다.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
[뭐? 그럼 뭐가 중요해?]
[그러니까 이 검은 머리 남자......후루야군 닮지 않았어?]
[에? 그렇게 물으니......닮은 것도 같은......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뭐냐고! 이 무슨 망측한 책이냐? 스즈키!]
[조용히 좀 해! 정말! 이건......그러니까 말이지......]
BL이라는 거야. 스즈키의 말에 사와무라는 물음표를 한가득 띄우며 물었다. 비......비......뭐? 사와무라의 물음에 스즈키는 눈에 힘을 주고선 한 번 더 또박 또박 알려줬다. 비! 엘! 보이즈 러브의 준말로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주제로 한......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스즈키의 설명에 사와무라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런 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건데! 스즈키의 열과 성을 다한 BL 강의는 사와무라로 인해 가차 없이 끊겼다. 이러한 반응에 스즈키 또한 지지 않고선 책상을 두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물어보기 창피했지만! 너무 닮았단 말이야! 사와무라군은 늘 후루야군이랑 붙어 다니니까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 아니야?]
그리고......사실......우리 내기했거든. 강경한 태도를 굽히며 어색하게 웃는 스즈키를 향해 에엣? 사와무라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세 사람은 지난 일요일, 스즈키의 집에 모여 사이좋게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제의 만화책’에 나오는 검은 머리 남자 주인공이 어딘가 모르게 후루야를 닮은 것 같다는 사토의 말에 스즈키가 동의하며 떠들기 시작했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모리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되자 세 사람은 한참동안 맞다, 아니다, 논쟁을 벌이다 결국 그럼 후루야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결론을 내리자고 내기를 하게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사와무라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버럭 외쳤다. 늘 붙어 다니지 않아! 같은 야구부의 라이벌 일뿐이라고! 이러한 사와무라의 주장에 스즈키는 아?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고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 얼른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 말을 해달라고 닦달을 하기 시작했다. 응? 닮았지? 닮았지? 부담스럽게 얼굴을 들이미는 스즈키와 사토의 뒤에서 모리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달라, 후루야군은 그런 표정 안 짓는단 말이야. 사와무라는 자신을 향해 얼굴을 들이미는 세 사람을 피하려고 의자를 뒤로 쭉 빼며 물러서선 삿대질을 해댔다. 아니, 내기건 뭐건 간에! 몰라! 알게 뭐야! 이상한 만화책이나 들고 와서 요상한 것만 물어대고! 이 망측한 물건을 들고 얼른 저리 가라며 외치려던 때에 무섭기로 전교에 엄하기로 소문이 난 수학 선생님의 벼락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다들 제자리에 앉아! 그제서야 사와무라를 둘러싸고 있던 세 사람은 이크, 짧게 중얼거리며 썰물처럼 흩어졌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사와무라는 한숨을 몰아쉬곤 뒷머릴 긁적였다. 정신 사나워 죽을뻔했네. 됐고, 수업이나 듣자! 사와무라는 교과서를 펼친 뒤, 연필을 물고선 칠판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수업을 듣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물고 있던 연필을 책상 위에 떨어트리며 꾸벅꾸벅 세상모르게 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