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고 있던 콜라를 입 밖으로 내뿜지 않은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입에 물고 있던 콜라가 목구멍으로 한번에 넘어가는 것까진 막을 도리가 없었기에 나루미야 메이는 콜라를 입 밖으로 내뿜는 대신, 사레가 들려 연거푸 기침을 해야만 했다. 기침이 어느 정도 가시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사와무라를 째려보는 나루미야였다.
"야, 지금 뭘 묻는 거야?"
"해봤슴까! 안 해봤슴까! 대답하십셔!"
"그러는 너는?"
너는 어떤데? 세이도 차기 에이스? 빈정거림이 묻어있는 목소리에 대번 낚인 사와무라가 펄펄 뛰어댄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늘 그런 식으로 대답을 회피하고! 비겁하다! 나루미야 메이! 이나시로의 미래가 걱정이다! 길길이 날뛰며 외치는 말에 나루미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야, 이나시로의 미래가 거기서 왜 나와?
"너 먼저 말해. 키스 해봤는지, 안 해봤는지, 먼저 말해주면 나도 말해줄게."
"참나, 당연히 해봤죠. 백 명 정도랑 했슴다."
"......너 초등학생이지?"
저기요, 사와무라군.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그런 허풍은 안 떨거든요? 넌 진짜 몸만 컸지 완전 애구나, 애. 한심하다는 투의 목소리였다. 사실 가장 한심한 건 나루미야,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참나, 당연히 해봤죠 라는 사와무라의 말에,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얼척없는 허풍일거라는 사실을 예상했음에도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니까. 어쩐지 분하다. 사와무라 에이준을 알게 된 뒤론 언제나, 늘, 분한 기분이었다.
"자, 대답했으니 이제 선배 차례임다. 해봤슴까! 안 해봤슴까!"
"당연히, 나도 해봤지. 한......천명이랑?"
이렇게 말하고선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나루미야였다. 아마도 이 자리에 미유키나 이츠키......누구든 제3자가 있었다면 이게 무슨 유치한 말장난이냐며 가늘게 뜬 눈으로 두 사람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을 것이다. 천명이랑? 장난으로 범벅이 된 나루미야의 말에 으이이이이익! 이 금발머리야! 장난치냐고! 왜 사람이 매사에 진지하질 못함까? 그거 병임다! 병! 불치병임다! 사와무라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다. 상상이나 했을까? 도쿄의 왕자라고 불리는, 천하의 나루미야 메이가 유치원생도 하지 않을법한 말장난을 치며 이렇게나 행복한 얼굴로 웃을 수 있다는 걸. 펄펄 뛰는 사와무라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것도 잠시, 나루미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안 해봤어."
"에?"
"안 해봤다고, 키스."
거짓말하지 마십셔. 지금 누구 앞에서 그짓말을 흠끄. 동공을 가늘게 뜨곤 험상궂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와무라의 반응에 나루미야는 뭐 씹은 얼굴을 해 보인다. 나 참, 장난을 치면 화를 내고 사실대로 말해주면 안 믿고......어쩌라는 거야?
"속고만 살았냐? 야구한다고 바빠죽겠는데 여자애랑 입술 비빌 시간이 어디 있어?"
"그치만 그런 것치곤 학교에서 틈만 나면 여자들이랑 붙어있는다고 들었슴다! 나도 정보원이 있다고!"
"......이츠키냐?"
아니? 어떻게! 알았지! 화들짝 놀라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또다시 소리를 내어 웃는 나루미야였다. 원래 이렇게 웃음이 헤펐던가? 또다시 분한 기분이 들었다. 사와무라 에이준을 알게 된 뒤론 계속 분하기만 했다. 여자들이랑 붙어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키스는, 아직, 입니다. 됐냐? 사와무라? 또박또박 내뱉는 대답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선 노려보고 있던 사와무라가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며 서서히 얼굴을 펴기 시작했다. 진짜지요? 그럼 됐슴다. 시원하기 짝이 없는 사와무라의 말에 나루미야는 뭐가 그럼 됐슴다냐? 라고 되받아 친다. 잠시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겨있던 나루미야의 입 밖으로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데, 나 해보려고."
"뭘요?"
"키스 말이야, 키스."
"뭣? 뭐? 누구랑? 언제! 어디서! 왜!"
"왜라니? 내가 키스를 안 해봤다는 사실에 사와무라가 너무 즐거워하니까."
"뭐? 그게 이윰까? 성질 나쁜 거 자랑함까!"
요란스럽게 방방 뛰는 사와무라의 손목을 나루미야의 손이 붙잡은 건 그때였다. 갑작스레 손목을 잡아오는 행동에 놀라 안 그래도 큰눈이 더욱더 휘둥그래진다. 쉴 새 없이 떠들던 입도, 한 순간이었지만 다물어졌다. 놀란 얼굴을 하고선 무어라 또 재잘거리려는 사와무라에게 나루미야는 잘 지어 보이는, 다소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서? 바로 여기서.
"언제? 지금."
"므므므므......무슨."
"누구랑?"
힘을 줘 붙잡은 손목을 끌어당기자 별 저항도 없이 몸이 휙 하고 끌려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와무라를 쳐다보며 천천히 얼굴을 들이민 나루미야가 중얼거렸다. 시끄럽게 쨍알거리는 너랑.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라도 나올 듯 시뻘겋게 물들어가는 사와무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제서야, 줄곧 분했던 기분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출근 시간대를 비켜간 시가지는, 원래라면 조금은 조용하고 한산해야겠지만 펑펑 터지는 소음과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시가지 한가운데에서 날뛰고 있는 빌런은 기이할 정도로 몸집이 큰 사내였고 자신의 피부를 돌로 만들어 외부에서 가하는 충격을 흡수하고, 그 돌을 포탄처럼 쏘아대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빌런을 둘러싼 여러 명의 히어로들 가운데 짜증이 한 가득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오, 썅! 무슨 놈의 피부가 이렇게 딱딱해? 야! 동글이!"
네가 손만 댔어도 지금쯤 발 닦고 잠이나 자고 있겠다! 우라라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바쿠고였다. 그 말에 발끈 화를 낼만도 했지만 학창시절부터 늘 겪어왔던 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녀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우라라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렇게 따지면 방금 전 빈틈이 보여 내가 접근하려 할 때, 바쿠고군이 신명 나게 폭파해댄 탓이 훨씬 크지. 핵심을 찌르는 우라라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바쿠고는 눈을 사납게 치켜 뜨며 시......시꺼! 더욱더 목소리를 높인다. 바쿠고의 폭파를 석화된 피부로 막아내고 있다 한들, 타격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맷집에는 자신이 있는 모양인지 빌런은 꿋꿋하게 바쿠고의 공격을 온몸으로 버텨내며 돌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대로가다간 이 일대가 남아나질 않겠다는 생각에 바쿠고는 쳇, 짧게 혀를 차며 이 빌런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폰에서 주인을 닮은 시끄럽고 요란한 벨소리가 울려댔다.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아까 전부터 몇 번이나 끈질기게 울리는 벨 소리를 무시했기에 어떤 새끼가 이렇게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대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폰을 꺼내 드는 바쿠고였다. 폰 액정 위로 '데쿠'라는 글자가 보인다. 바쿠고는 쏟아지는 빌런의 공격을 피하며 신경질적으로 통화버튼을 누르곤 냅다 외쳤다.
"야! 데쿠! 바빠! 끊어!"
사정없이 종료버튼을 누르려던 때에 폰에서 흘러나온 미도리야의 다급한 목소리가 바쿠고의 손가락을 멈추게 만든다. 미도리야의 말에 뭐? 데쿠! 크게 말해! 놀란 표정으로 닦달하는 바쿠고였다. 캇짱......에리가......미도리야의 입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이름이 나오자 바쿠고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당장 그리로 갈 테니까 기다려!"
[카......캇짱......]
시가지가 붕괴되기 오보직전인 이러한 상황에서 여유롭게 통화나 하고 있냐고 말하려 고개를 돌린 우라라카의 눈에 흉흉하다 못해 살기가 번뜩이는 얼굴로 무너진 건물 더미를 박차고 뛰어오르는 바쿠고가 들어왔다. 바쿠고군! 당황한 우라라카의 외침이 들리지도 않는지 난동을 부리고 있는 빌런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바쿠고는 온 힘을 다해 오른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뒈져! 이 새끼야! 바쁘니까 지금 당장 죽어!"
모래바람이 일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그 일대를 사정없이 울리며 빌런에게 직격으로 들어갔다. 무수한 공격을 꿋꿋하게 버텨내던 빌런도 혼신의 힘을 다한 바쿠고의 맹공을 버틸 순 없었던 모양인지 눈에 흰자를 띠우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빌런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바쿠고는 자신을 부르며 다가오는 우라라카에게 뒤처리를 부탁한다고 말하곤 어디론가로 서둘러 향하기 시작했다. 삐죽삐죽한 뒤통수에 대고 어디가, 바쿠고군! 우라라카가 황급히 외치자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바쿠고가 말했다.
"......유치원."
미도리야 에리는 5살답지 않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유치원 건물 구석에 숨어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있었다. 노란색 유치원복과 어깨에 맨 작은 가방, 굽슬굽슬한 녹색 머리와 얼굴에 나있는 주근깨는 미도리야를 닮았지만 찌푸린 얼굴과 사납게 뜬 적색 눈, 흰 피부는 영판 바쿠고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이 입술을 앙 물고선 인상을 쓰고 있는 에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누군가가 저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숙였던 고개를 들자, 앞엔 다름아닌 에리의 아빠, 미도리야가 난처하다는 얼굴을 하고선 서있었다. 미도리야라는 걸 확인한 에리의 고개가 다시 푹 숙여진다. 그 모습에 미도리야는 에리의 옆에 앉아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리, 아빠 왔는데 인사도 안 할거야?"
"......몰라. 다 미워. 속상해."
"우리 공주님이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아빠 궁금한데......"
말해주면 안될까? 응? 다정다감한 미도리야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선 눈물을 참고 있는 에리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점점 느리고 조심스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에 위안을 받은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앙 다물고 있던 에리가 울먹울먹 눈물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자애들이 아빠가 둘이라고 놀렸어. 그래서 싸웠는데 내가 우리 대디랑 파파가 얼마나 멋진 히어로인지 아냐고 그러니까 애들이 파파를 놀리잖아. 그런 히어로가 어디 있냐고, 완전 무섭다고, 사실은 빌런 아니냐고 자꾸 놀려서......그래서......그래서......"
"그래서......때려준 거야?"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였다. 이것 참, 이런 점은 캇짱을 닮았다니까. 에리는 언젠가부터 미도리야를 대디로, 바쿠고를 파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빠라고 부르면 둘 다 돌아본단 말이야. 칭얼거리는 에리의 말에 놀러 왔던 우라라카가 정해준 호칭이었다. 바쿠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남자애들을 때려줬다는 에리의 말에 잘했다고 박수를 쳤겠지만 미도리야는 미소 띤 얼굴로 에리의 볼을 쓰다듬었다. 입이 삐죽삐죽 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에리, 친구들을 때리면 안되지."
"그치만......"
치켜 뜬 커다란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미도리야는 당황하며 주머니에서 얼른 손수건을 꺼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미도리야는 말을 이었다.
"에리, 생각해봐. TV에서 파파가 나쁜 사람들이랑 싸우는걸 봤지?"
"......응."
"파파는 종종 늦게 집에 들어오잖아. 나쁜 사람들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고, 사람들을 구하다가 늦게 들어오고 그런 거야."
"......"
"그러니까 친구들이 그런 점을 모르고 파파를 욕하며 놀린다고 해서 화내고 슬퍼할 거 없어.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파파는 멋진 히어로고, 에리의 파파인걸.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리고 아빠가 둘인 게 어때서? 다른 애들은 하난데? 에리가 다른 애들과는 달리 특별하다는 뜻 아닐까? 아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말에 흐르는 눈물이 잦아들었다. 바쿠고의 아이가 아니랄까봐 특별하다는 말이 내심 마음에 드는지 눈물을 멈춘 에리가 미도리야를 쳐다보았다. 에리의 큰눈에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미도리야의 선량한 얼굴이 들어온다. 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다는 생각에 미도리야에게 폭 안겨선 가슴팍에 볼을 부비적거리고 있던 에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론 안 그럴게."
"그래, 그래, 친구들이랑도 나중에 꼭 화해하는 거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버려 흙이 잔뜩 묻은 에리의 바지를 털어주며 웃던 미도리야가 헛!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황급히 에리에게 말했다.
"아참, 에리. 이번 일은 파파한테 비밀로 하자. 응?"
"왜?"
"왜냐면 파파가 알면 또 한바탕......"
"데에쿠우우우우!"
뒤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히이익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는 미도리야였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온 건지 흙먼지와 검댕이를 뒤집어 쓴 히어로 복장의 바쿠고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미도리야를 향해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앗! 파파다! 파파! 죽일 듯 미도리야를 보며 으르렁거리던 바쿠고의 표정이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에리의 얼굴에 대번 풀어졌다. 더 이상 이글거리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척척 이쪽으로 다가온 바쿠고가 자신의 멱살을 잡았기에 미도리야는 살짝 겁먹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카......캇짱......저기......그러니까......
"다 들었어! 뭘 비밀로 하자는 거야! 숨길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말......"
"앗! 대디, 파파, 싸우지마! 남자애들이 아빠만 둘이라고, 엄마도 없다고 놀렸지만 이제 괜찮......앗! 대디! 미안!"
대디가 비밀로 하자고 그랬는데! 당황하며 합하고 입을 틀어막는 에리와 그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으아아 소리를 지르는 미도리야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바쿠고를 바라본 미도리야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방금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던 바쿠고가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죽었어! 뒤진다, 진짜! 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유치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기등등한 얼굴로 유치원을 날려버릴 기세인 바쿠고를 다급하게 쫓아가 간발의 차로 붙잡는 미도리야였다.
"캇짱! 안돼! 5살밖에 안된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할 셈이야!"
"놔!"
미도리야에게 붙잡혀 발버둥을 치는 바쿠고였다. 나참! 캇짱, 제발! 히어로답게! 미도리야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선 바쿠고는 자신을 잡고 있는 팔을 뿌리치며 외쳤다.
"놓으랬다! 데쿠! 이 너드새끼! 네가 그러고도 부모냐! 에리가 그런 말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어? 엉? 그래! 내가 오늘 이 유치원을 아주 통째로......악! 데쿠! 너 이 새끼! 지금 개성 쓴 거냐? 야!"
팔을 뿌리친 것도 잠시, 미도리야의 원포올에 움쭉달싹 못하고 붙잡힌 바쿠고가 소리를 질러댔다. 놓으라며 난리를 치는 바쿠고를 끌어안은 미도리야가 우물쭈물 대꾸했다. 그......그치만 캇짱을 막으려면 나도 별수가......막으려는 미도리야와 품을 벗어나려는 바쿠고로 난리가 난 가운데 두 사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에리의 얼굴 위로 점점 웃음꽃이 피어난다.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파파는 멋진 히어로고, 에리의 파파인걸. 다정한 미도리야의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냉큼 달려간 에리가 주변을 폭파하기 오보 직전인 바쿠고와 그를 껴안고 있는 미도리야 사이로 파고들자 거짓말처럼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신들의 사이에 파고들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도리야와 바쿠고의 손을 하나씩 잡은 에리가 밝게 웃으며 외쳤다. 대디! 파파! 나 배고파!
"나 카레 먹고 싶어! 카레 먹으러 가자!"
발그레한 얼굴로 해맑게 웃는 딸의 모습에 미도리야와 바쿠고,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미도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유치원을 박살낼 기세였던 바쿠고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뻗는 에리를 들어서 품에 안은 바쿠고가 미도리야에게 말했다. 가자, 데쿠. 소란스러웠던 하루를 마무리하는 한마디였다.
아이비트리오(토마스, 뉴트, 민호) 중심 non-coupling 개인지 [땅을 박차고] 재판 수량조사 받고 있습니다. (~3/29)
구매의사가 있으시다면 원하시는 수량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수량조사 분량에 맞춰 들고 갈 예정입니다.
문의는 댓글과 @oscuridad_4 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재 통판 계획은 없으나 통판을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oscuridad_4로 문의 부탁드립니다.
<사양>
- A5
- 떡제본
- 74page
<커플링>
- 아이비트리오(토마스, 뉴트, 민호) non-coupling
<가격>
- 8,000원
<부스위치>
- 얼01
<샘플>
- 현대AU로 육상부인 토마스와 민호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친구인 뉴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학원물입니다.
- 샘플은 아래 더보기를 눌러주세요.
땅을 박차고 달리는 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렸다. 뉴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층계에 앉아 육상 명문답게 흠잡을 곳 없이 정비된 트랙을 질주하고 있는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시회가 있는 달을 제외하곤 월요일과 수요일에만 부활동이 있는 미술부와는 달리 육상부는 매일 방과 후에 남아 훈련을 하곤 했다. 마침 부활동이 없는 화요일이라 육상부 훈련 구경이나 해볼까 라는 마음에 앉아있었지만, 정작 뉴트가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늘 훈련을 밥 먹듯 빼먹는 토마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성실하기 그지없는 육상부 주장 민호마저 보이지 않는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락이라도 해볼까 싶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낸 그 때, 시끌시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고 바라본 그 곳엔 역시나 민호와 토마스가 있었다. 뉴트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걸어오는 한 명과 끌려오는 한 명에게 손을 흔들었다는 게 맞으리라. 토마스는 민호에게 귀를 잡힌 채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고, 민호는 토마스에게 사정없이 폭언을 퍼붓고 있는 듯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선명해졌다.
"야, 이 대가리에 똥만 찬 놈아! 네가 문화부냐? 엉? 일주일에 두 번......아니, 두 번이 뭐야? 훈련에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일까 말까 하다는 게 말이나 되냐? 너 오늘 죽었어."
"아, 진짜! 아직 대회까진 멀었잖아! 왜 벌써부터 땀을 좍좍 흘리며 심장 터지게 뛰어야 되냐고."
"한 달 남았는데 멀었다는 말이 나오냐? 이 망할 놈이 진짜!"
뉴트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둘, 여전하네."
"뉴트!"
뉴트의 등장으로 자신의 귀를 붙잡고 있던 민호의 손에 힘이 빠지자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쪼르르 달려오는 토마스였다. 민호를 피해 뉴트의 등 뒤로 숨으며 긴 팔로 그를 끌어안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스킨십이 서슴없다니까, 뉴트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민호가 자꾸 구박해. 토마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이런 토마스의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소매를 걷으며 주먹을 치켜드는 민호였다.
"이 똘추 새끼, 진짜 죽여주마. 이리 안 와!"
자신을 사이에 두고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를 질러대는 민호와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피하며 이건 교내 폭력이야! 라고 소리쳐대는 토마스 덕분에 뉴트는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휘청휘청 사정없이 휘둘리고 있던 뉴트는 급기야 소리를 빽 질렀다.
"그만 하지 못해! 이 똘추들아!"
뉴트가 차례대로 두 사람의 머리를 가격하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머리통을 부여잡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죽겠다며 요란하게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토마스에게 뉴트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토미, 또 땡땡이치다 민호에게 붙잡힌 거야?"
"아니, 그러니까......"
"대회까지 한 달이 남았다면 코앞에 닥친 거나 진배없다는 생각엔 나도 동의하는데? 작년에 출전하지 못한 한을 이번 대회에서 다 풀어야 할 것 아니야. 그리고 대회와는 별개로 육상 선수는 언제나 기본적인 체력 훈련을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뉴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자신을 타이르자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시무룩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토마스였다. 민호는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뉴트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이 똘추야. 새겨들어. 민호의 말에 토마스는 쳇 소리를 내며 골반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보인다.
"걱정하지 마! 매일 아침 지각하지 않기 위해 뛰고 있으니 체력 훈련은 그것으로 됐지, 뭐. 그리고......"
안 봐도 뻔해. 작년엔 벤이 우승했다며? 그렇다면 이번 대회 단거리 달리기 종목별 우승은 어차피 내 차지일 텐데. 벤이 들었다면 분명 화를 냈을 법한, 오만함과 자신감으로 가득한 말에 다시금 핏대를 올리려는 민호를 뜯어말리며 뉴트는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토미, 기록을 재는 스포츠에선 말이야. 궁극적인 라이벌은 자기 자신이야. 과거의 너라고."
"......"
"자기 기록을 갱신하는 데에 집중해야지 그게 무슨 똘추 같은 소리야. 자, 잔소리 말고 어서 가서 훈련해."
입을 삐죽이며 무어라 툴툴거리던 토마스는 하-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별 수 없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는 입매가 시원했다.
"뉴트가 원한다면."
토마스는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곤 뒤돌았다. 입고 있던 긴 팔 저지를 벗으며 트랙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뉴트의 귀에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여간 건방진 놈. 진짜 재수 없단 말이야."
하지만 뉴트는 알고 있었다. 재수 없다는 민호의 말이 절반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민호는 그 누구보다 토마스를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불성실한 토마스의 태도에 코치님과 부원들이 무어라 한 마디씩 할 때면 민호는 늘 그의 편을 들어주곤 했다. 막 전학을 온 토마스에게 육상부에 들지 않겠냐고 끈질기게 권유했던 것도 민호였다. 토마스의 실력을 인정하고, 누구보다 아끼며 친하게 지내면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늘 툴툴거리기 바쁜 민호의 태도가 우습다는 생각에 뉴트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다소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녀석이 단거리 달리기 선수라서 다행이야."
"왜? 장거리 달리기 선수면 이길 수 없을 까봐?"
100m, 200m, 400m가 주력인 토마스와는 달리 민호는 5,000m, 10,000m를 뛰는 장거리 달리기 선수였다. 은근한 도발이 섞인 자신의 말에 이길 수 없다니? 누가? 내가? 웃기지마. 대번에 받아 치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민호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사실 부럽기는 해. 저 재능이......"
"......"
"하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한들 나는 지지 않아. 질 생각도 없고......그리고......"
"......"
"이상한 소리인줄은 알지만 나는 부럽고 짜증나긴 해도 토마스가 땅을 박차고 튀어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좋거든."
속내를 감추지 않고 훤히 드러낸 것이 쑥스러워진 모양인지 민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날도 추운데 대충 구경하고 얼른 집에 들어가라. 언제나처럼 거칠게 내뱉는 말 속엔 자신을 향한 애정이 서려있다. 그래, 열심히 해라.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뉴트를 뒤로 한 채, 민호는 트랙으로 달려가며 부원들에게 소리친다. 트랙 위엔 몸을 다 풀었는지 어느새 스타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토마스가 보였다. 짙은 눈동자 위로 번뜩번뜩 금빛 섬광이 비치는 듯했다. 달리기 직전의 토마스를 보고 있자면 나사가 수십 개는 빠져 보이는 평소의 그와 동일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신호총이 울림과 동시에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간다. 여전히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뉴트는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는 자신의 오른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희들이 가장 부러운 건 다름 아닌 나야. 하지만......”
토마스에 이어 민호도 트랙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뉴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부러워. 하지만 너희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는 게 나의 행복이기도 해. 뉴트는 마음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하며 토마스가 전학 온 1년 전의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추억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공기를 떠돌던, 쾌청했던 나날들을.
아래층 침대에서 콜록콜록 기침하는 소리와 함께 어미 잃은 새끼강아지마냥 끙끙 앓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기에 덩달아 잠을 설치고 있는 쿠라모치였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래층을 향해 시끄러워 죽겠네! 감기는 또 어쩌다가 걸려서는 사람 잠도 못 자게 만드는 거냐? 버럭 하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조함이 더 커져만 간다. 저 또한 독한 감기로 앓아 누웠던 경험이 있지만 365일 24시간 건강할거라 생각했던 저 바보가 저리도 앓을 정도라니......생각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 아니야? 이런 저런 생각에 좌로 우로 몸만 뒤척이고 있었다. 자정을 지나 새벽으로 넘어가자 기침소리와 앓는 소리가 점점 심해졌기에 쿠라모치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잠자긴 글렀구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침대 계단을 밞고 내려오자 모로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사와무라가 보였다. 땀을 얼마나 흘리고 있는 건지 입고 있는 티셔츠는 군데군데 젖어있었고, 목덜미는 축축하게 번들거린다. 쿠라모치는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야......사와무라, 많이 아프냐?"
"......선배......왜 안 잠까......"
아래층에서 콜록콜록 끙끙 난리를 치는데 잠이 오겠어? 내가 귀머거리냐? 퉁명스레 말을 내뱉으며 쿠라모치는 침대맡에 걸터앉아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사와무라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곤 천천히 바로 눕혔다. 어깨만 잡았음에도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열기가 상당했기에 쿠라모치는 당황한 얼굴로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이마엔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고, 얼굴은 전체적으로 붉게 열이 올라있었다. 쿠라모치는 가볍게 혀를 차고선 자신이-사와무라에게-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타카시마 부부장에게 아침 일찍 연락할 테니 병원에 다녀와."
"......괜찮슴다......사나이......사와무라 에이......"
무슨 말을 할지는 뻔했지만 그조차도 마무리하지 못하곤 콜록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는 꼴이 딱했기에 쿠라모치는 일어나 깨끗한 수건을 꺼낸 다음, 찬물을 흠뻑 적셔 물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그것을 짰다. 후끈후끈 열이 오르는 이마에 차가운 수건이 닿자 사와무라는 잠시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피식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낸다.
"......고맙슴다."
"......웬 감기야? 나한테 옮기기만 해봐. 그간 아껴놓았던 레슬링 기술들을 전부 다 퍼부어줄 테니까."
아직 웃을 기운은 있는지 약한 웃음소리는 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 큰놈이 갓난아기도 아니고 뭘 이렇게나 앓는 거야?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마에 찬수건을 올려주는 것 외엔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숨소리가 가빠지자 마음이 더욱더 초조해진다. 쿠라모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고 있던 사와무라가 자신은 괜찮으니까 얼른 올라가 잠을 청해보라고 한다. 누군 자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지 알아? 평소처럼 띠껍게 대꾸하려다가 쿠라모치는 말을 삼켰다. 한참 뜸을 들이다 그래, 짧은 대답을 하고선 자신의 침대 위로 올라온 쿠라모치의 귀에 여전히 사와무라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은 벌써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여전히 저 망할 기침은 그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쿠라모치는 알람을 5시 30분으로 맞춰놓곤 눈을 감았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타카시마 부부장에게 전화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침 일찍 타카시마 부부장에게 전화를 해 사와무라가 병원에 다녀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쿠라모치는 피곤에 찌른 얼굴로 식당 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쿠라모치의 귀에 자신을 부르는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쿠라모치, 사와무라는? 이 자식은 하여간......아침 인사도 생략하고 자기가 궁금한 것부터 묻고 앉아있어. 쿠라모치는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감기 걸려서 앓아 누웠다, 왜?
“뭐? 감기?”
감기라니? 바보는 감기 안 걸리잖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미유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얼굴을 구기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쿠라모치의 반응에 그제서야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냐는 듯 뚫어져라 눈을 마주쳐오는 미유키였다. 배식을 받은 뒤, 미유키의 반대편에 밥과 반찬이 쌓여있는 식판을 내려놓고선 쿠라모치가 말했다. 목소리엔 쿠라모치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큼 한숨이 잔뜩 섞여있었다.
“웃을 일이 아니라고. 간밤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진짜 사와무라가 어떻게 잘못되는 줄 알았단 말이야. 하기야 나도 뭐, 처음엔 녀석이 코를 훌쩍이며 연신 기침을 해대길래 감기 따위나 걸리고 난리냐며 비웃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밤새도록 죽어라 앓아대지 뭐야. 결국 타카시마 부부장이 이른 새벽부터 기숙사에 들러 병원에 데려갔어. 오늘 연습은커녕, 수업도 못 들어갈 거다.”
밥 먹으러 오기 전에 보니까 시체 같은 몰골로 병원에서 돌아와 약 먹고 바로 눕던데 괜찮은지 모르겠네. 하루도 빼먹지 않고 타이어를 허리에 매고 달리고, 새벽까지 남아서 투구 연습을 해대면서도 기운이 넘치다 못해 폭발을 하더니......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이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밤새 아팠고, 병원을 다녀왔고, 연습은커녕 수업도 못 들어간다고 짧게 말하려던 본 의도와는 다르게 말이 점점 길어졌다. 이 와중에 미유키는 여전히 상황판단이 안 되는지 자신을 향해 짓궂은 목소리를 낸다.
“애절하다, 애절해. 쿠라모치, 후배를 걱정하는 네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서 밥이 안 넘어갈 지경인데? 어디 보자, 가슴은 안 찢어졌어?”
미유키가 고개를 쭉 빼고선 자신의 가슴 부근을 들여봤을 때, 주먹을 들어 머리통을 때려줄까 잠시 고민한 쿠라모치였지만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미유키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다였다. 웃기지마,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모를 줄 알아?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 건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능글맞게 웃으며 놀리듯 참견하고, 밉살스러운 말로 속을 뒤집어놓긴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타입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할게 분명했다. 그런 미유키의 마음을 어느 순간부터 눈치챘다는 건 아마 나도......여기까지 생각한 쿠라모치가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어이, 미유키. 좀 솔직해져라.”
“......?”
“나한테 아침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사와무라는 어디 있냐고 물어온 게 누군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사와무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놈이......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하여간 갑갑하다니까. 가차없는 비난에 미유키는 잠시 우물거리다 이내 입을 다물고선 뒷머릴 긁적였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짐작하고 있었지만 왠지 자신의 말로 인해 확인사살을 당한 느낌이었기에 쿠라모치는 묵묵히 입 안으로 밥을 떠넣었다. 답답하게 구는 미유키가 짜증나는 건지, 아니면 그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감정은 뭔지......더없이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연습이 시작되었지만 평소와는 달리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미유키의 모습에 쿠라모치는 쯧, 짧게 혀를 차보았다. 저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거면 기숙사에 들러보라고 말했던 자신의 말에 왜 태연한척하며 그럴 것까지야 라고 허세를 부린 거야? 하여간 답답한 놈이라니까. 얼이 단단히 빠진 미유키의 상태에 대해 조노가 물었을 때도 그저 몰라 짧게 대답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겠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족을 덧붙이고 싶었다. 바보라서 그래, 바보라서. 알 수 없는 쿠라모치의 대답에 애꿎은 조노만 어리둥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타격 연습을 시작했을 때, 저 멀리서 미유키가 오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노에게 무어라 말을 하며 보호대를 벗는 것이 뒤늦게나마 기숙사로 가서 사와무라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게 뻔했기에 쿠라모치는 배트를 휘두르던 것을 멈추곤 미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이 딱-하고 마주친다. 언제나 여유로운 미유키 카즈야답지 않게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황한 듯 한순간 눈을 크게 떴기에 쿠라모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픽,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고선 다시금 배트를 휘두르는 쿠라모치였다. 미유키의 모습이 점점 멀어질 때마다 배트를 휘두르는 팔에 힘이 더 더 들어간다. 미유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쿠라모치는 있는 힘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다.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이유는 분명 나 또한......배트에 공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힘껏 치고 나면 마음이 좀 홀가분할까 싶었지만 여전히 무겁고, 종잡을 수도 없었다. 바보라서 그래, 바보라서. 조노에게 했던 말이 미유키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쿠라모치는 입을 꾹 다물곤 배트를 다시 한번 더 휘두르기위해서 팔에 힘을 주었다.
하교길이라고 말하기엔 꽤나 늦은 밤 골목길을 걸어 서로의 집으로 향하던 중, 옆에서 걷고 있던 사와무라가 툭 하고 내뱉은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떠 보인 미유키였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와무라의 눈이 가늘게 떠져있었고, 얼굴 위론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난데없는 비난에 미유키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묻는다.
"다짜고짜 글렀다니? 네 무례함의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냐?"
아니면 그거......신종 사랑고백이야? 눈썹을 까닥이며 묻는 미유키를 향해 사와무라는 골목길이 울릴 만큼 큰소리로 아니야! 소리를 치곤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고백이라니! 진짜 글러먹었슴다! 그게 어떻게 사랑고백이야!
"이것 보십셔! 선배는 오늘 제가 가지고 있는 많고 많은 낭만 중 하나를 무참히 깨버렸다 이 말임다."
"......난 그딴 거 깬적 없는데."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표정엔 진심이 가득했다. 미유키의 말에 사와무라는 대번 세모눈을 뜨고선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댄다. 미유키 카즈야아아아! 내가 왜 당신이 정신줄을 놓고 다니는 바람에 잃어버린 지갑을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있어야 했는데! 학교에 두 사람이 남는 경우는 영화나 만화, 드라마에선 높은 확률로 낭만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이벤트라고! 평소 서로에게 마음은 있었지만 고백하기 전인 남녀 주인공이 허술한 경비 아저씨 때문에 교실에 갇힌다던가! 아, 그래! 영화 러브레터처럼 후지이 이츠키와 후지이 이츠키가 그랬듯이 자전거 페달을 돌려 전조등을 밝히는......밤의 학교는 그런 낭만이 가득한 장소인데 왜! 나는! 미유키의 지갑을 찾기 위해 교실과 복도 그리고 운동장에 엎드린 채 기어 다녀야 하는 검까! 내 낭만 어쩔 거야! 셔츠가 뜯어질 만큼 세게 멱살을 잡고선 분노하는 사와무라에게 언제나처럼 저기, 나 선배......의미 없는 저항을 해보는 미유키였다.
"그리고 사와무라......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낭만이라기 보단 밤의 학교에 사람이 남을 경우 귀신이 나타나거나 살인사건이 벌어지지, 안 그래?"
"글렀네! 답 없이 글러먹었네!"
미유키의 해석에 멱살을 놓으며 사와무라는 다시금 삿대질을 해댔다. 미유키는 특유의 싱글거리는 표정을 하고선 사와무라를 놀리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사와무라가 생각하는 낭만은 어째 너무 촌스러운데? 너무 뻔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거든? 그 말에 사와무라는 부들부들 떨며 어금니를 악물고선 중얼거렸다. 야구 바보가 믈 을겠슴끄......낭만이 므 으때스.......그 말에 미유키는 가볍게 소리를 내어 웃어 보인다.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본 것은 그때였다. 도쿄에선 잘 보이지 않는 별이 오늘따라 웬일로 밤하늘에 드문드문 박혀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어, 별이다 중얼거리자 부들부들 떨며 자신에게 대꾸할 말을 생각해내고 있던 사와무라의 동그란 머리통이 위를 향해 움직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본 사와무라가 잘난 척을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뭠까? 미유키. 저 정도로 놀람까? 저건 별 축에도 못 든다고요. 나가노에선 새까만 하늘 위에 점점이 박혀있는 별들이 마치 땅으로 쏟아져 내릴 정도임다. 늘 그렇듯이 자신의 고향인 나가노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는 사와무라였다. 생기 넘치는 얼굴로 나가노의 밤하늘에 대해 떠들어대던 입이 한 순간 다물어졌기에 미유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와무라는 여전히 밤하늘로 향해있는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언젠간......"
"......?"
"언젠간 말임다. 미유키에게도 보여주고 싶슴다."
"......뭐를?"
"청색이 도는 짙은 검은빛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는 그 광경을요."
분명 역시 네 낭만......너무 뻔하고 촌스럽잖아? 놀리기엔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사와무라의 그 말에 미유키의 얼굴 위로 서서히 미소가 번진다.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얼굴이 아래로 떨어지며 눈을 마주쳐왔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그 표정으로, 시원하게 웃는 입매를 하고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와무라를 향해 미유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