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린 (팔에 멍든) 에쥰이가 보고 싶은 욕망에 그만......
“뭐? 감기?”
감기라니? 바보는 감기 안 걸리잖아.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미유키와는 달리 어째 쿠라모치의 표정은 심각하다. 그제서야 왜 그런 표정이냐는 얼굴로 쿠라모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미유키였다. 들고 있던 식판을 내려놓으며 쿠라모치는 한숨이 섞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웃을 일이 아니라고. 간밤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진짜 사와무라가 어떻게 잘못되는 줄 알았단 말이야. 하기야 나도 뭐, 처음엔 녀석이 코를 훌쩍이며 연신 기침을 해대길래 감기 따위나 걸리고 난리냐며 비웃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밤새도록 죽어라 앓아대지 뭐야. 결국 타카시마 부부장이 이른 새벽부터 기숙사에 들러 병원에 데려갔어. 오늘 연습은커녕, 수업도 못 들어갈 거다.”
밥 먹으러 오기 전에 보니까 시체 같은 몰골로 병원에서 돌아와 약 먹고 바로 눕던데 괜찮은지 모르겠네. 하루도 빼먹지 않고 타이어를 허리에 매고 달리고, 새벽까지 남아서 투구 연습을 해대면서도 기운이 넘치다 못해 폭발을 하더니......얼굴을 찡그리며 사와무라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쿠라모치를 향해 미유키는 짓궂은 목소릴 내기 시작한다.
“애절하다, 애절해. 쿠라모치, 후배를 걱정하는 네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서 밥이 안 넘어갈 지경인데? 어디 보자, 가슴은 안 찢어졌어?”
미유키가 고개를 쭉 빼고선 자신의 가슴 부근을 들여다보자 쿠라모치는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이, 미유키. 좀 솔직해져라.”
“......?”
“나한테 아침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사와무라는 어디 있냐고 물어온 게 누군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사와무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놈이......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하여간 갑갑하다니까. 가차없이 쏟아지는 비난에 미유키는 내가 언제 그랬냐고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곤 뒷머릴 긁적였다. 쿠라모치의 말대로 매일 아침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큰 소리로 인사하는 사와무라가 보이질 않자 단박에 물어본 건 사실이었으니까. 감기라는 말에 농을 쳤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밀려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와무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쿠라모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속마음과는 달리 말과 행동은 늘 정반대였기에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바보 같은 제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다. 사와무라의 솔직함을 반에 반만 닮아도 좋으련만......부질없는 가정을 하며 미유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되면 들러보던가? 쿠라모치의 말에 미유키는 그럴 것까지야 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쿠라모치도 포기한 듯 말을 길게 덧붙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5호실에 찾아가 사와무라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한발자국 물러섰다. 사와무라를 향한, 애정이 분명한 그 마음에 거리를 두는 미유키였다. 사와무라가 아프다는 소리를 들은 뒤론 뭘 해도 집중이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창 밖을 내려다보거나 쉬는 시간에도 스코어북을 펼쳐놓고선 멍한 표정으로 응시만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연습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기에 조노가 쿠라모치에게 저 녀석 왜 저렇게 얼이 빠져있냐? 라고 물어올 정도였다. 물론 이 질문에 쿠라모치는 시니컬한 목소리로 바보라서 그래, 바보라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했고, 조노의 궁금증은 풀리긴커녕 커져만 갔다. 공을 받고 있던 미유키가 갑자기 일어나 오노를 부른 건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오노.”
“응?”
“잠시만 공 좀 대신 받아줘. 잊은 게 있어서 기숙사에 다녀올게.”
“지금?”
“응,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오노에게 말하며 보호대를 벗는 미유키와 타격 연습을 하고 있던 쿠라모치의 눈이 딱-하고 마주친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쿠라모치의 모습에 미유키는 잠시 당황했지만, 둘러댈 틈도 없이 픽,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고선 다시금 배트를 휘두르는 쿠라모치였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아니었으면 답지 않게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이다.
쿠라모치는 알아차린 듯 했지만, 잊은 게 있어 기숙사에 다녀오겠다는 것은 사와무라의 상태를 제 눈으로 살펴보기 위해 대충 둘러댄 말일뿐이었다. 5호실의 문 앞에서 살짝 심호흡을 한 미유키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사와무라, 좀 어때? 괜찮아?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며 들어선 5호실은 불이 꺼져 있었고, 늘 시끄러운 평소의 분위기완 반대로 적막이 가득했다. 잠시 불을 켤까 싶었지만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와무라가 잠들어있는 듯 보였기에 손을 거두어들인다. 소리가 나지 않게 방안으로 들어온 미유키의 눈이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제서야 미동 없이 침대에 모로 누워있는 사와무라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까지 다가갔음에도 사와무라는 꼼짝 않고 누워있었는데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미유키는 한숨을 쉬며 옆에 놓여있는 수건을 들어 조심스레 땀을 닦아 주었다. 이마에 손등을 살짝 대었을 때 적잖이 후끈했기에 미유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펄펄 끓잖아. 약은 먹고 자는 거야? 욕실로 가 수건을 차갑게 적신 미유키는 모로 누워있는 사와무라를 조심스레 반듯하게 눕힌 다음, 이마 위에 수건을 올려주었다.
그 녀석, 자기말론 원체 건강해 이렇게 골골대는 일이 거의 없는데, 어쩌다 한번 아프면 호되게 앓는 체질이라더라. 쿠라모치의 말을 떠올리며 미유키는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다소 거친 숨을 내쉬며 기절한 듯 잠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미유키의 시선이 사와무라의 오른팔로 향한다. 얼룩이 져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여다본 오른팔 안쪽은 시퍼런 멍으로 가득했고, 손등에 붙어있는 반창고로 보아선 링거 주사를 맞을 때 혈관이 잘 잡히지 않아 주사 바늘을 여러 번 찔렀다 뺏다 한 모양이었다. 미유키는 저도 모르게 사와무라의 왼손을 깍지 껴 잡으며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손등 위는 땀이 배어있어 끈적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만약 사와무라가 깨어있었다면 본심과는 달리 그를 놀리며 화를 돋았을 테지만, 그가 깊이 잠들어있는 지금 이순간만큼은 달랐다. 손등에 입맞추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미유키였다. 맨날 시끄럽다고 놀리고 구박했는데, 이렇게 아플 바엔 차라리 시끄러운 게 백배 낫겠다.
“......사와무라.”
“......”
“좋아해. 네가 좋아.”
“......”
“나도 알아,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공 받아주십셔! 라고 외치는 그 해맑은 얼굴에다 대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요하는 것인지.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직설적이고, 무서운 것 없는, 천하의 미유키 카즈야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속마음과는 다르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사와무라를 눈으로 좇으며 집착하고 그의 주변을 질투하는 자신이었다. 손등에 대고 있는 입술을 떼지 않으며 미유키는 좋아해, 좋아하고 있어, 좋아한다 연거푸 속삭이며 사와무라를 향한, 이러한 고백을 언젠간 직접 건넬 수 있길 빌어보았다. 이런 비겁한 꼴이 아닌, 당당한 모습으로.
“좋은 아침임다!”
식당 안으로 떠들썩하게 들어서는 사와무라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어이, 사와무라. 죽을 뻔 했다면서? 에이, 저 얼굴 좀 봐. 죽을뻔한 얼굴이 아닌데? 말짱하구먼, 목소리도 여전히 크고. 모두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사와무라였다. 당연하죠! 감기 따위에 굴복하는 그런 나약한 사람이 아님다! 자, 말끔하게 다 나았으니 식사를 해보실까! 밥그릇에 한 가득 밥을 담는 사와무라를 코미나토가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 에이쥰군, 그 동안 계속 죽만 먹었잖아. 갑자기 많이 먹으면 탈나. 끄떡없다고 대꾸하는 사와무라에게 미유키의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팔 안쪽 한 가득, 시퍼렇게 들어있던 멍이 어느새 진해져 검보라빛을 띠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미유키의 미간이 아주 살짝 좁혀진다.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건지 밥을 담다 말고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봅니까? 라고 물어오는 듯한 눈빛에 미유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이, 사와무라.”
“네?”
“어쩌냐?”
“......?”
“네가 침대에서 죽치고 누워있는 동안 후루야는 엄청......엄청나게 열심히 연습했는데.”
이로써 실력차가 더 벌어지는 거 아니야? 미유키와 마주 앉아있던 쿠라모치의 얼굴 위로 경악이 번졌다. 쿠라모치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사와무라는 쥐고 있던 주걱을 밥솥에 푹 꽂으며 분노가 들끓는 얼굴을 하고선 소리치기 시작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한테 그러고 싶슴까! 성격 나쁜 거 자랑하냐! 아니, 그전에 며칠 연습 안 했다고 해서 실력차가 그렇게 확 벌어지지 않거든! 미유키 카즈야 이 자식! 두고 보자! 얼른 밥 먹고 운동장 뛰러 가야지! 후루야, 넌 또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질줄 알고! 전날까지 아파서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펄펄 뛰며 열을 내는 사와무라였다. 쿠라모치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소리 없이 미유키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너 진짜 못됐다. 쿠라모치의 반응에 미유키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선 고개를 돌려 어느새 자신을 향해있던 분노를 후루야에게 퍼붓고 있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몸 상태는 많이 좋아진 모양이다. 기운이 넘쳐 보이는 사와무라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유키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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